나를 키운 건 팔할이 중소기업이다. 04
임직원이 700명인 시절이었다. 입사 초기에는 300명이었는데 회사가 많이 성장했다. 규모가 커지면서 당연히 회장님을 뵐 시간은 월례회 정도 말고는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 호출에 사뭇 긴장이 되었다. 가보니 인사 안 받아주는 한 부장님도 계셨다.
‘어. 글치 주임, 이번에 한 부장이 일본에서 가져온 신제품의 샘플인데, 우리가 이런 제품을 만들 것인지 검토가 필요한데 같이 잘 협력해서 분석해 봐요’
‘네 알겠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콘셉트의 제품이었다. 그걸 어떻게 분석해야 할지도 막막했고, 어색한 사이인 한 부장님과 이걸 해야 한다니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부장님, 샘플을 주시면 제가 몇 가지 테스트해보겠습니다.’
‘이미 테스트 한 결과들이 있으니까, 참고하세요.’
왠지 부드럽다. 아마도 업무자체의 소스가 높은 곳이고 본인도 도움이 필요하니 그랬을 것이다. 어찌 됐든 열심히 자료를 검토하고, 테스트를 했다. 문제가 있었다. 제품이 좋지 않았다. 고민이 되었다. 아무리 봐도 이 제품은 좋은 콘셉트가 아니었다. 양산성도 현격히 떨어진다. 이런 제품에 손대는 것은 회사로서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됐다. 얼마 뒤 한 부장님과 중간 미팅을 가졌다.
‘부장님, 제품이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죠? 저도 그런 거 같습니다. 이거 사실 제가 찾은 제품도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 보고해서 드롭될 수 있게 합시다.‘
생각과 달리 반색하시는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아마 부장님도 어쩌다 떠맡은 일이었구나 싶었다. 다행이었다. ‘있는 그대로’ 이 방식은 공돌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니 오히려 좋다.
그렇게 잘? 드롭을 시켰다. 얼마나 안 좋은지 시뮬레이션 같은 고급스킬까지 가미해서 보고서를 만들었다. 얼마나 좋은지가 아닌 보고서는 난생처음이었지만 잘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부장님과의 어색함도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직장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편도 없음을 배우게 되었다. 결국 주어진 일을 해내기 위해 다시 협업하고, 또 멀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솔직히 너무 깊게 인간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 관계로 인해 깊은 상처나 실망이 생기기 쉽기 때문이다.
언제나 통하는 ‘그러려니’ 스킬을 장착하는 게 여러모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