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클러스터링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었습니다. 물론 저녁이 없는 삶은 경험적으로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녁을 경계점으로 일과 삶이 분류되어 버리는 개념 또한 부작용이 있습니다. 하루의 24시간이 그렇게 쉽게 분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일과 삶을 분리할 수 있을까? 흔히 “퇴근하면 일 생각하지 말라” 혹은 “직장에서는 사적인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최고의 아이디어는 휴식 중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최근에도 중요한 발표자료에서 핵심적인 슬라이드의 구성 아이디어가 샤워 중에 떠올랐습니다. 아이디어가 날아가버리는 경험들이 생각나서 물기만 닦고 책상에 앉아 슬라이드를 만들었습니다.
가정에서 벌어진 어려운 일은 아무래도 직장에서의 태도와 집중에 영향을 미칩니다. 팀원의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였습니다. 건강이 안 좋은가 했더니 집안에 일이 있었던 겁니다. 바로 집으로 보냈습니다. 어차피 일에도 집중할 수 없어 보였습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분리된 일과 삶의 균형(balance)이 아니라, 융합되어 있는 일과 삶의 조화(Work & Life Harmony) 일 겁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매 순간을 하나의 데이터 포인트로 가정해 봅니다. 데이터 분석에서 클러스터링(Clustering) 은 비슷한 성질을 가진 데이터를 그룹으로 묶는 기법입니다. 삶의 데이터 포인트를 클러스터링 해봅니다. 과연 일고 삶으로 분류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도 클러스터 간의 경계는 항상 명확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 겹치기도 합니다.
“일” 클러스터와 “삶” 클러스터가 완전히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두 영역을 넘나듭니다.
업무 집중 모드인 순간들이 “일” 클러스터에 가깝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삶” 클러스터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업무 중에도 가족 생각이 떠오를 수 있고, 산책 중에 업무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는 것이 삶입니다.
퍼지 클러스터링은 모호한 분류입니다. 하나의 데이터가 몇 군데에 속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적당한 클러스터링 방법인 듯합니다. 우리의 순간들은 여러 클러스터에 속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직장인’이면서도 동시에 ‘부모’, ‘친구’, ‘배우자’ 등의 다양한 역할을 합니다. 경계가 모호한 삶을 분류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일과 삶을 인위적으로 나누려 할수록 스트레스만 커집니다.
저녁이 있는 삶 = 행복한 삶
일수 있지만
행복한 삶 = 저녁이 있는 삶
으로 필요충분조건이 되진 않습니다.
어떤 날은 저녁은 대충 때웠지만 성취감을 맛보고, 그 성취감이 주는 행복감으로 자녀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일찍 퇴근해서 집에 갔고 저녁을 먹지만 지지부진한 실적으로 회사에서 쌓여만 가는 스트레스가 가족들에게도 전해져서 짜증스러운 식사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시간이든 어떤 장소이든 결국 모든 것을
삶의 순간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한정된 나의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에너지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에너지는 일터에서 소모되고 집에서는 생성되는 것이라면 결국 나의 가족이 소모되고 맙니다.
에너지는 사실 어디서든 만들어질 수 있고 어디서든 소모될 수 있습니다. 에너지의 부호(-,+)는 환경보다는 상당 부분이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 에너지의 부호를 바꾸는 방법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일과 삶은 균형을 맞추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에게 에너지를 주고받는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결국, 우리의 목표는 완벽한 분리가 아니라, 자연스럽고 건강한 조화가 되야겠습니다.
제프 베조스의 말입니다.
"If I am happy at home, I come into the office with tremendous energy," Bezos said, according to Business Insider. "And if I am happy at work, I come home with tremendous energy. You never want to be that guy — and we all have a coworker who's that person — who, as soon as they come into a meeting, they drain all the energy out of the room ... You want to come into the office and give everyone a kick in their step."
에너지의 부호를 잘 관리하면
에너지가 넘치는 부호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