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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선규 Oct 29. 2022

숲속의 성, 크르지보클라트(Křivoklát) #1

 여행을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 있을까? 음식, 잠자리, 낯선 환경 등 다들 여러 경험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길을 잘못 들었을때가 아닐까싶다. 낯선 곳, 통하지 않는 언어는 내가 길을 잘못들었을때 쉽게 패닉에 빠지게 만드는 최적의 조건이다. 오늘 여행할 이곳도 그렇게 시작했다.


 그간 미뤄왔던 크르지보클라트(Křivoklát)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저번에 기차 시간에 살짝 늦어 코노피슈테(Konopiště)로 급하게 노선을 변경했던 기억에, 일찍 일어나 도시락도 싸고 기차시간에 맞춰 중앙역으로 갔다. 시간표도 정확히 확인하고 시간도 제대로 맞춰 11시44분에 들어온 열차를 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분명 베룬(Beroun)역에서 환승해야 하는데 기차 안내판에는 스미호프(smichov)역까지만 표기되어 있었다.

분명 타기 전에 직원한테 두 번이나 확인했는데, 그 직원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맞다고 한건지... 크르지보클라트와는 인연이 아닌가 싶어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멀리 온게 아니라 일단 스미호프역에서 내려 어플을 확인했다. 다음 열차는 2시간뒤... 순간 '이 아무것도 없는 이 열차 역에서 기다려야 하나?', '일단 다시 돌아갈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여기서 두 시간을 기다리는 건 무의미 하단 생각이 들어 다시 프라하 중앙역으로 돌아왔다.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왜 기차를 놓쳤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문득 열차 플랫폼을 보니 시간대에 따라 두 개의 열차가 함께 정차할 때가 있었다. 즉, 전광판에는 a, b로 표시되어 a가 먼저 출발하고 b가 다음으로 출발하는 형식이다. 아까 나는 그걸 확인하지 못 한 채 열차의 한 칸 차이로 앞에 기차에 탔던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확인하고 열차를 탔다. 독일까지 가는 기차라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한국에서라면 북적북적한 열차에 진이 빠져 짜증났을 법도 하지만 여행중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여행지에서는 '사람구경'이라는 것 하나로도 즐거워 진다. 

환승역 베룬(Beroun), 보이는 열차가 크르지보클라트(Křivoklát) 행 미니열차다.

 그렇게 사람 구경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환승역인 베룬(Beroun)역에 도착했다. 베룬역에 내리자 바로 옆 승강장에 크르지보클라트(Křivoklát) 행 열차가 대기하고 있어 편히 환승했다. 쿠트나 호라(Kutná Hora)에 갈 때와 마찬 가지로 몇량 되지 않는 귀여운 미니 열차였는데, 이런 열차를 탈 때면 마치 나는 심장에서 뿜어져 나와 대동맥을 타고 구석구석 모세혈관으로 흘러들어가는 적혈구가 된 기분이다. 보통 작은 열차들은 모세혈관처럼 구석구석 작은 마을들을 이어주는 교통으로 사람들도 적고 굉장히 한산하다.


 여유를 즐기며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미국인 가족이 옆 자리에 앉았다. 꼬마아이 둘은 앉은 순간부터 스무고개 비슷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크르지보클라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뒤에 소개할 '나이팅게일 새의 전설' 밖에 몰랐던 터라 나는 슬쩍 미국가족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는 아이들과 노느라 정신없었지만 곧 잘 대답해 주었다. 그는 자신을 존이라고 소개했으며 뉴욕에서 프라하에 파견을 와 10년째 보다폰 마케팅 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은 프라하 지사 근속 10년 주년 기념으로 휴가를 받아 가족들과 놀러가는 길이라고 덪붙였다. 10년 근속 휴가라니... 새삼 유럽의 회사 문화에 감탄을 했다. 


 얘기 거리를 생각하던 중 학부 마케팅 수업 때 기업사례로 보다폰을 발표했던적이 있어 마케팅에 대해 몇 가지 물어봤다. 역시 본인 분야의 얘기다보니 우리나라 아저씨들과 다름없이 끊이질 않는 이야기를 했다. 슬슬 전문용어가 나오고 내 마케팅에 대한 지식이 떨어져가자 나는 본격적으로 크르지보클라트에 가는 이유를 물어봤다. 


 크르지보클라트성은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고성(古城)중 하나로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그 분위기 때문에 존이 체코에서 가장 좋아하는 성 중 하나라고 했다. 특히 성 근처 강에서 수영과 바비큐를 즐길 수 있어 아이들과 휴가 오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했다. 

얘기가 길어지다 보니 아이들은 내게 아빠를 뺏겼다 싶었는지 입술이 뾰루퉁나왔다. 아이들 눈치 때문에 이야기는 그만 접어두고 아저씨는 다시 아이들과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대화가 길었는지 생각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존에게 더 많은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가족과의 시간을 뺏기 싫어 그쯤에서 헤어졌다.

자그마한 크르지보클라트 역

 역에서 나와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내려가자 작은 강이 보이고, 다리를 건너자 드디어 숲에 둘러쌓인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크르지보클라트도 여느 근교마을처럼 작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곳도 이곳의 선선함과 선선한 바람이 주는 상쾌함을 따라갈 곳이 없었다. 거대한 숲에 둘러 쌓여 주는 자정감이 마치 나의 몸과 마음도 깨끗하게 치유해주는 기분이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

 여기 까지 읽으면서 Křivoklát를 크리보클라트가 아닌 크르지보클라트라 썼는지 분명히 의아해 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ř'과 같이 알파벳 위에 붙은 하첵(háček) 읽는 법에 대해 알고가자. 인터넷에 보게 되면 체코어 지명에 있어서 틀리게 표기해 놓은 블로그들이 많다. 이는 체코어의 알파벳이 다른 영어의 알파벳 체계와 조금 다른 점에서 오는 차이점때문이다. 크르지보클라트(Křivoklát)도 마찬가지이다. r위에 하첵이 있으면 '에르쥐'비슷하게 발음을 하는데 편히 'rz'를 대입해서 읽으면 된다. 그래서 크리보클라트가 아닌 크르지보클라트라 읽는다. 


 여행에 군것질이 빠질 수 없어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 성으로 향했다. 이정표를 따라 5분정도 걸어 올라가자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덕에 우뚝 솟은 높은 성인데, 마치 '라푼젤이 갇혔던 곳이 이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끔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 소개할 옛 이야기에 따르면 까를왕 또한 라푼젤 처럼 이곳에 갇혀있었다고 한다. 

성으로 향하는 길
크르지보클라트 성

아내을 위한 까를4세의 선물


 미래의 로마 황제이자 보헤미안의 왕인 까를4세는 보헤미아의 왕이자 룩셈부르크 가문의 요한

(John of Luxembourg)과 보헤미아의 공주인 엘리자베스(Eliška Přemyslovna)의 아들이다. 요한은 장차 왕이 될 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그의 부인 블랑쉬(Queen Blanche de Valois)와 함께 크르지보클라트로 보내 통치하도록 했다.

까를4세와 그의 아내 블랑쉬

까를4세는 쉴틈없이 일을 하며 버려지다 싶이 했던 성을 재건축하기 위해 주변 농경지를 정리하고 프라하 성에 필적할 만한 궁을 짓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까를4세의 통치력이 그의 아버지 요한 왕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까를4세가 본인의 업적을 차근차근 쌓아 가던 어느날, 요한 왕이 크르지보클라트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까를4세는 그간 어떤 것들을 이루었는지 아버지에게 자신있게 드러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한 왕은 신하들에게 까를4세가 본인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루머를 듣게 되었고 결국 까를4세와 그의 부인을 크르지보클라트에 가뒀다. 이로인해 아버지에게 인정 받고 싶은 까를4세의 바램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까를4세의 부인 블랑쉬는 원래 미적 감각과 예술적 소양이 깊어 문화생활에 항상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크르지보클라트에 갇힌 후에는 무료한 나날만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알았기 때문에 아무 불평하지 않았지만 하루하루 무료한 삶을 지속하던 블랑쉬는 성의 돌처럼 감정이 점점 메말라가고 말이 없어지게 되었다.


 아내를 무척 사랑했던 까를4세는 당연히 그녀의 슬픔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 날 블랑쉬는 그녀의 하인들과 함께 숲에서 새의 소리를 들으며 숲의 향기를 느끼고 있었고 까를 4세는 그런 아내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문득 그녀에게 해줄 작은 이벤트를 떠올렸다. 그는 즉시 그의 하인들을 불러 최대한의 많은 나이팅게일(새의 일종)를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는 성의 한켠을 가득채울 정도로 가득했고 새들의 지저귐은 어느새 거대한 운율이 되어 크르지보클라트의 온 숲을 가득 채웠다. 

나이팅게일

블랑쉬는 남편의 사랑에 다시 기운을 차렸고 그가 왕이 될 때를 대비해 열심히 그를 보필했다. 후에 나이팅게일은 성주변에 퍼져 오랜 시간동안 멜로디가 끊이질 않았다. 현재에도 왕과 왕비가 자주 걷던 길은 나이팅게일의 길(Path of Nightingales)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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