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츠키 레스토랑
웅장한 성을 뒤로 하고 우리는 성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자 눈 가득 햇빛과 함께 들어올 때는 미처 보지 못한, 쿠트나 호라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비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 하루 성당 안이나 은광처럼 시야가 좁은 곳에 있다 탁 트인 전경을 보니 좀 더 시원하고 마음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쿠트나 호라의 전경을 천천히 살펴보다 나오미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상황을 읽었다는 듯 한 바탕 크게 웃었다. 마침 오는 기차에서 쿠트나 호라 맛집을 미리 추천받은 곳이 있어 나오미와 함께 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의 이름은 ‘다치츠키’라는 곳으로 음식과 함께 이곳만의 하우스 맥주를 판매하는 곳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를 이끌었던 이유는 바로 적당한 가격에 사슴고기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레스토랑은 성 바르바라 대성당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외관은 여타의 다른 레스토랑과 다른 점이 없었지만 입구에 들어선 순간 이곳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내부는 온통 중세의 분위기를 풍기는 장식품들로 가득했고 심지어 웨이터들도 중세의 시녀 복장을 입고 있어 내가 진짜 중세시대에 왔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치츠키 맥주 한 잔을 거의 다 비웠을 때, (체코는 보통 맥주 한 잔을 다 비워갈 때쯤 음식이 나온다. 점원을 재촉하지 말자) 기다렸던 음식이 나왔다. 역시 음식은 비주얼이다. 스테이크를 감싸는 베이컨과 보기만 해도 입안이 짭짜름해지는 시즈닝, 그리고 크렌베리 소스가 흩뿌려진 데코레이션까지.. 정말 입에 넣기 아까울 정도로 맛있어 보였다.
나오미가 한 입 먹는 순간 일본 특유의 감탄사를 연발하며 웃음을 지었다. 자신 있게 데려왔는데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라고 생각했던 걱정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식사를 하는 동안 서로의 소소한 얘기들을 하며 그 상황을 즐겼다. 하지만 문제는 식사가 끝날 때쯤 일어났다. 비가 올 것이란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체코에서 처음 겪어보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산은 고사하고 비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던 우리는 비가 그칠 때까지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식당 처마 앞에서 한 없이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며 서 있자니 불현듯 <가을동화>가 생각났다. 비에 살짝 젖은 나오미에게 나는 잔잔한 향기에 설레었다.
그 순간 나는, 불현듯 '비를 맞으며 같이 뛰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슬쩍 나오미를 쳐다보며 눈으로 얘기했다. 나오미는 나를 올려다보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내 셔츠를 우산 삼아 같이 뛰기 시작했다. 맨발바닥에 느껴지는 유럽 특유의 돌바닥 느낌이 매끄러웠다. 그리고 스치는 살결이 부드러웠다.
이렇게 같이 신발을 벗고 셔츠를 우산 삼아 비속을 뛰고 있자니 이번엔 마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같았다.
지금 함께하는 이 길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우리는 그렇게 기차역에 도착했고 서로 연락처를 물어보지 못한 채 헤어졌다.
비록 더 함께하지 못하고 프라하로 돌아왔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글을 쓰는 지금도 따듯한 설렘에 두근거리게 된다. 문득 비가 오는 날이면 '연락처라도 물어볼껄' 하는 생각이 들지만 추억은 추억으로 묻어두기로 했다. 짧았던 만남이었지만 비 오는 날 회상할 수 있는 따듯한 추억이 생겨 나에게는 쿠트나 호라가 그 어떤 곳보다 따듯하게 느껴진다.
지금의 여행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증샷을 찍고 SNS에 올리는 게 목적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진정한 여행은 아름다운 추억과 인연 그리고 그것을 간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여행은 인연을 만들고(그것이 연인이 되었든 장소가 되었든) 그것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날 그때의 기억이 문득 떠올라 추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여행이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