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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기 Aug 06. 2019

일요일의 라며언


    라면이다, 라면. 그것은 틀림없는 라면이었다.

    일요일이었고, 늦잠을 잤고, 방안에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라면이 끓고 있었다. 라면이 끓으면 왠지 강물 냄새가 났다. 강가에 가면 라면 냄새가 났다고 해야 하나(아무튼).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강가에 가곤 했다. 한참을 바람을 맞으며 강물 냄새를 맡다 보면 그렇게 라면이 먹고 싶었다.   


    그럼 그렇지. 부엌에는 엄마 대신 아버지가 계셨다. 엄마가 아침부터 라면을 끓일 리가 없다.

    "일어났나? 상 펴라." 왠지 신이 났다.

    '오줌 누고 손 씻고 와라, 자다 와 그리 방구를 끼노? 속이 안 좋드나? 밥 묵고 진작 물을 마이 무서 그릏다, 소화 안 된다고 삼십 분 이따 무라 안 했나......' 대신에, 짧고 굵게.

    게다가 아침부터 라면이라니. 얼른 상을 펴고 앉았다. 히죽, 웃음이 새는 걸 겨우 참았다.


    잠결에 희미하게 들었지만, 아버지와 엄마가 다투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라면을 끓이고 계신다. 끼니때마다 새 밥을 짓고 새 국을 끓이던 엄마였다. 아버지와 어린아이들 끼니를 챙기지 않으신 것으로 보아 아버지가 아주 크게 잘못한 게 틀림없다.


    딸깍, 불이 꺼지고 냄비를 들던 아버지가 어째 다시 내려놓으셨다. 찬장을 열어 무언가를 찾으신다. 라면이 식으면 안 되는데... 잠시 후 유리그릇을 싱크대 위에 내려놓으셨다. 집에 저런 그릇이 있었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음처럼 투명한 그릇이었다. 그리고 냄비를 들어 천천히 라면을 부으셨다. 


    쨍―

    얼음처럼 투명했던 그 그릇은 정말로, 얼음처럼 갈라졌다. 강물 같은 라면 냄새도 오목하게 모였다 '쨍' 하고 퍼졌다. 아버지는 눈앞에서 나는 떨어져서, 얼음 그릇을 가르고 쏟아져 나가는 라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느리지만 거침없었고 두 갈래였지만 일사불란했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낮고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다 문득, 멈추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도 모르게 입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한 번 더 숨을 내쉬었다. 좀 전보다는 조금 짧고 빨랐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고, 웃으셨다.

    "에헤이, 와 깨지뿌노 이거?"

    그리고 냄비에 다시 물을 받아 끓이셨다. 다행히 라면이 두 개 더 남아 있었다. "와 깨지뿌노? 참내......" 아버지의 등은 화가 나 있었지만 계속 그렇게 웃으셨다.   


    아버지는 엄마를 화나게 했다. 엄마는 집을 나가셨다. 아버지는 라면을 끓이셨다. 아버지에게는 강물 냄새 같은 게 날 리가 없다. 라면이지만, 좋은 그릇에라도 먹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마저 안 되고 말았다. 화가 났지만 당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라면을 끓이며 계속 웃으셨다. 이 말이 하고 싶으셨으리라. 아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걱정 마라. 아무 일도 아니다.'  

 

    ***


    엄마는 점심때를 조금 넘겨 돌아오셨다. 여느 때처럼 새 밥을 짓고 새 국을 끓이셨다. 어느새, 시원한 김칫국과 고마운 고등어 구이가 놓였다. 그 '어느새'는 아버지가 깨져버린 그릇 앞에서 숨을 길게 내쉰 시간보다 짧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말없이 드셨다. 엄마는 조금 요란하게 설거지를 하셨다. 아버지는 고봉밥 한 그릇을 몇 분만에 다 드시고 국물을 물처럼 마셨다. '어읏차' 소리를 내며 일어선 아버지는 헛기침을 두 번, 쩝 소리를 네 번 정도 내시며 밖으로 나가셨다. 왠지 뒷일을 나에게 맡기고 자리를 피하시는 듯했다. 엄마는 그제야 색깔도, 익은 정도도 일정하지 않은 밥(들의 집합)을 가지고 내 옆에 와 앉으셨다.  


    "아침 뭐 뭇노? 라며언? 하이고오 시상에......"

    엄마는 마치 법적으로든 도의적으로든 먹어서는 안 될 것이라도 먹은 것마냥 한껏 '' 발음 톤을 치켜들었다. 그때 함께 올라갔던 턱의 방향으로 보아 그것은 내가 아닌 다른 이를 향한 항의와 비난이었다.

    "배고팠제? 자, 얼른 무라."

    엄마는 내 밥그릇에 반찬을 올려주었다. 젓가락으로 콩도 집어먹던 실력이었지만 밥숟갈을 입으로 쏙 집어넣고 새로 밥을 퍼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면 곧 새 반찬이 숟갈 위에 올랐다.


    식사가 끝날 때쯤 아버지가 돌아오셨고 엄마는 다시 요란하게 설거지를 하셨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틀어 일요일 낮에 재방송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셨고, 이따금 웃으셨다(라면을 다시 끓일 때와는 다른 웃음이었다). 부엌도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아버지는 그래도 텔레비전만 보고 계셨다. 나도 그 옆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긴 했지만, 별로 웃기지는 않았다. 이따금 고개를 돌려 부엌을 보았다. 밥 먹은 지 삼십 분쯤 지났을 때 벌떡 일어나 '엄마아' 하고 부르니, 엄마가 물을 떠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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