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X기획자의 NEXT STEP을 꿈꾸며
2023년 초, 저의 지인 한 분께서 아주 용하다는 철학집 한 곳을 소개해주었습니다.
본래 저는 '적극적 운명론'을 가지고 있었기에 굳이 미신이니 토정비결이니 하는 것들에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는데요. 올해는 저에게 슬럼프 아닌 슬럼프가 시작되고 있던 해였습니다.
부동산 투자자의 꿈을 키우며 여러 강의와 학습을 반복하였지만, 매수한 아파트의 투자 실패로 인해
지금까지도 높은 이자를 부담하느라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부업을 꿈꾸며 너도 나도 할 거 없이 수익형 블로그와 생성형 AI를 활용한 유튜브 채널 생성에 열을 올리고 있던 찰나, 저도 그 파도의 흐름에 타보려고 강의도 듣고 계정까지 생성했지만 이상하게 집중도 안되고 콘텐츠 하나 제대로 올리지 못한 채 그냥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의 추월차선이 뭔가 꺾여버린 느낌이 들었죠.
동시에 30대 중반이라는 그 나이가 제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열정과 배움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기엔
전 이제 이미 늙은 나이가 되어가고 있었고, 이직조차 하지 않은 채 첫 직장에서만 6년 동안 일하고 있었기에
다른 회사의 담당자분들을 만나면 듣는 소리는 한결같았습니다. '굉장히 오래 다니셨네요' '오우, 이제 고인 물소리를 들으실 단계 아닌가요?'라는 말들을 말이죠.
한 마디로 표현하면, 저는 그냥 아직 어른아이 같습니다. 난 아직 여전히 배울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고, 관리자가 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실력과 실수투성이에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별로 없어 보이는 내가. 그렇다고 남들처럼 돈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경제적 부를 창출하는데 공을 들인 것도 아닌. 난 그저 '자기 계발'이라는 향락과 제 멋에 취해 인생을 헛되이 살았구나 라는 생각에 자기반성을 하염없이 하면서 못난 저를 탓하기도 했습니다.
생각이 복잡하고 겪지 않은 불안이 엄습할 때 제가 종종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집중하는 것인데요. 메타인지를 확대해 본 결과 저는 일을 좋아하고, 일을 통해 얻은 배움을 공유하며, 일터가 나의 재능을 실험하며 꽃 피울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 멘토링을 할 때나 후배들에게는 '일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라고 하지만, 네.. 저는 그게 안 되는 인간 같더군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과정에서 지난 6년의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불모지에 가까웠던 CX, 서비스 운영, CS 서비스 기획이라는 키워드를 알리기 위해 다방면의 활동을 하기 위해 노력했고, 혹여 본업을 게을리하면서 외부 활동만 열심히 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받을까 걱정하며 누구보다 현업에도 매진하려고 했습니다.
브런치도 쓰고, 기고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현업 CX 기획자의 생각을 들려주려 강의도 나가는 등 내실을 놓치지 않으며 이 직무를 시장에 널리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적지 않았습니다. CX 기획자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를 가보면, 'CX의 가치를 몰라주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개발자에게 요청사항을 전달하는 경우, 서비스 기획팀이나 전략 기획팀에서의 요청사항은 곧 잘 들어주면서 고객의 최접점에서 요구사항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는 CX기획자의 말은 왜 정작 후순위로 두는 것이냐', '서비스의 여정을 개선하는 작업이 중요하지만 사실상 비즈니스의 임팩트는 퍼포먼스와 프로덕트 매니징, 비즈니스 기획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 CX 기획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스피커의 역할만 하는 CX 기획이 어떤 비즈니스 임팩트를 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등 여전히 CX 직무 시장에 대한 이해는 이해도가 떨어졌고 임원 분들의 생각 또한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제가 이 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사람들의 아낌없는 지지와 응원이었습니다. 2018년, 회사를 입사해서 처음 보는 직무에서 커리어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때 온라인상에서 처음 만난 분이 천세희 님이었습니다.
CX 기획이라는 개념을 우리나라에 처음 알린 사람이자 그로우 앤 베터의 수장으로서 배움을 넘어 기업의 혁신을 돕는 기관을 만들어 CX 기획자에게는 귀감이 되는 커리어를 밟아오신 CX 업계의 구루였는데요.
아무것도 아닌 저였지만 나 같은 주니어도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부딪히고, 실수하고, 배운 것들을 누군가에게 공유해 준다면 천세희 님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은 힘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되뇌며, 브런치에 글을 계속해서 연재해 나갔습니다.
일이라는 것을 삶에서 절대 뗄 수 없는 제가,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선 2가지 처방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동일 직무를 유지한 채 이직하는 것, 다른 하나는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제가 사랑하는 CX의 가치를 더욱 드높이고 많은 CX 기획자들에게 'CX 기획자의 커리어 로드맵은 이렇게 만들어 갈 수 있다'라는 새로운 선택지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가치가 있었습니다. 후자는 상당히 리스크 했죠. 투자인지 매몰비용인지는 모르지만, 기존의 업무 노하우와 CX 직무 내에서의 누구와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지, 프로젝트의 순서를 알고 있고, 레거시를 모두 파악해 누구보다도 업무를 잘 해낼 수 있는 역량을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2년 뒤면 과장 진급을 앞둔 제게 인사 평가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닥쳤습니다.
고심 끝에 제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습니다. 네, 이번에도 모험을 선택한 것인데요.
CX 기획자 분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고객의 문제를 선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내가 차라리 기획자가 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라는 생각 말이죠. 저 또한 그러한 문제를 겪었던 터라 문제의 해결범위를 넓히고 해결력을 제고시켜 서비스 운영과 기획을 아우르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CX 기획자 출신으로써 좋은 커리어 로드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인사이동 공고를 보자마자 팀 전환 신청을 했고, CX 기획팀 팀장님과 인사팀 담당자분께 면담을 신청하며 새로운 업무에 대한 간절함을 피력했습니다. 하지만 만나는 분들마다 하나 같이 가능성이 없다고들 하시더군요. 디지털 전략 전담 사업부를 만들고 사내에 유래 없는 애자일 조직을 만든다는 소식에 한 것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대부분 경력직 또는 과장급 이상만 뽑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사내에 데이터 분석 직무와 관련된 사내 채용공고를 보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원했고, 요청하지도 않은 포트폴리오를 20장 내외로 만들어 '데이터 분석뿐만 아니라 프론트, 백오피스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사내에 있어요'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새벽시간까지 쪼개어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사내 대형 프로젝트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도 말이죠.
그리고 인사 발표 당일, 저의 노력 때문인지 아니면 인사팀과 CX기획팀 팀장님의 도움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원하던 프로덕트 팀으로 배정되었습니다. 백오피스 팀으로 말이죠.
만감이 교차하던 순간이었습니다. 간절히 바라던 것을 힘을 모아서 성취하게 되었을 때만큼 기쁜 것이 없으니까요. 대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던 순간, 최종 입사 합격을 통보받던 순간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저는 '공짜'는 없었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이, 나쁜 일이 생기면 꼭 좋은 일이 생기기 마련인데요. 이번에는 후자였습니다.
익명의 제보로 저의 브런치가 회사기밀 정보 유출로 사내 정보보호팀과 인사팀에 신고가 되어있던 것이었습니다. 항변하고자 한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 저 나름대로 구체적인 사례와 문제해결의 접근 방식을 디테일하게 적은 것이 해석의 여지에 따라 회사의 정보를 활용해 사익을 추구한 것으로 모자라 기밀을 유출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해석이었습니다.
익명의 제보는 회사 사람일 테고, 누구인지도 알 수 없으며, 저의 브런치와 인스타그램을 비공개 계정으로 또는 유령 계정으로 팔로우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도 이름만 말하지 않았을 뿐 저의 팀명을 거론하여 '00팀에서 강의하고 다니는 애?' '근데 걔 신고는 하는 거임?' '책도 냈다던데 ㅋ' 이런 식으로 말이죠.
인사발령 후 터진 일로 인해 적지 않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은 안 하고 외부활동만 열심히 하는 애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았는데 새로 옮긴 팀의 팀장님과 임원분들께 혹여 선입견만 만들진 않을까 걱정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 브런치를 봐오시거나 이전 글을 찾으시는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문제가 될 소지의 글은 전면 비공개처리하였으며 브런치 북은 일부 정보를 삭제해 둔 상황입니다.
이런 순간을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글을 작성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좀 더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동시에 저를 신고한 익명의 제보자를 탓하기보다 지금 것 자만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 조금 더 겸손해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행동했던 저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제는 CX기획자가 아닌 PM으로, 그리고 풋내기 신입으로서의 겪을 좌충우돌이 무섭기도 하고 걱정도 되지만 늘 그래왔듯 잘나서가 아니라, 그저 먼저 해본 경험들을 최대한 쉽고 재밌게 공유하며 저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브런치를 시작했던 초심으로 돌아가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연말/연초의 바람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의 지지와 응원 보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리며 어떠한 경로로 인입되셨을 독자님 또한 부디 이루고자 하는 것을 끝까지 잘 이어나가길 바라겠습니다.
중요한 건, 중꺾그마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