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공백
주식 시장의 거의 모든 종목에는 스마트 머니=세력이 있다.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믿음의 영역에 가깝다. 왜냐하면 나 또한 세력을 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물증은 없다. 다만 심증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투자자들을 합리적으로 설득할 자신은 없다. 세력이 없다고 해도 설명이 안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쪽으로 생각하든 주식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느 정도 설명된다.
나는 앞 장에서 그것을 유신론과 무신론에 비유했다. 세상에는 신이 있다고 믿는 이들과 없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세상의 일은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다 설명이 가능하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다. 보통은 설득되어서 넘어가기보다는, 살면서 어떤 사건을 겪고 거기서 스스로 깊은 깨달음을 얻어 전향하는 경우가 많다.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 하는 발상은 많은 것들에 적용 가능하다. 국가는 어떤가. 국가는 실체가 있는가 없는가. 영토, 국민, 헌법 등이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국가를 추상적인 관념이라 간주할 수도 있다. 화폐는 어떤가. 지갑 속 지폐와 돼지저금통 안 동전, 그리고 계좌에 찍힌 검은 숫자를 화폐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화폐를 세는 단위일 뿐 화폐 자체는 아니라고 반문하는 것도 타당하다.
'나'라는 존재는 어떤가. 나는 단일하고 분명한 실체인가. 정체성은 그처럼 단단한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가. 그런 식의 질문을 하다 보면 '나'는 오리무중이 되고 만다. 자아, 정체성, 주체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니체 같은 학자들은 '나'를 고정된 실체로 간주해 온 그간의 서양철학자들을 정신병자로 치부했다.
개인적으로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라캉의 설명을 아끼는데, 그는 '나'의 가장 중심은 공백이라고 주장한다. 그 공백을 갖가지 심리적인 층위가 겹겹이 싸고 있는 게 인간의 내면이다. 프로이트라면 그러한 심리적 층위들을 무의식, 전의식, 의식이라거나 혹은 이드, 자아, 초자아라는 식으로 부를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처음부터 '나'라는 관념을 오해로부터 구성한다. 그는 당시 동물생태학을 참고하는데, 연구에 따르면 인간뿐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자신을 주변 환경의 이미지로 착각한다. 대표적인 게 동물의 의태인데, 보통은 의태를 천적으로부터 숨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지만, 100년 전 다소 잔인한 실험에 의하면 의태를 하는 곤충과 하지 않는 곤충의 생존률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 말은, 의태가 생존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동물들이 의태를 하는 이유는 주변의 감각적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다. 라캉은 그에 착안하여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한 대목을 떠올려보자. 굴뚝 청소를 하고 나온 두 아이 중 한 아이 얼굴에 검댕이 묻었다. 이때 세수를 하는 아이는 누구일까. 역설적이게도 검댕이 묻지 않은 아이다. 왜냐하면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상태를 짐작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기들이 자신을 처음으로 이해하고 정립하는 과정과 같은 맥락이다. 아기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상을 보고, 혹은 다른 사람이나 대상을 보고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처음부터 '나'라는 존재는 외부 대상과의 동일시에서 시작하기에 어긋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 후 아기는 (주로 부모님과 가족의) 언어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게 되지만, 언어라는 것은 명명되는 순간 맞음과 틀림이 동시에 발생하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시스템이기에 틈은 더 벌어지고 만다.
누군가 나를 '인간'이라고 부르면 인간과 나의 교집합만큼은 맞지만, 여집합만큼은 틀린 게 된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 해도 사정은 같다. 그가 생각하는 나와 현실의 나는 다르므로, 그 차이만큼의 괴리가 발생한다. 그것이 언어의 본질적 특성이자 한계이다.
인간은 태어나 자라면서 보고 들은 이미지에 대한 리플렉션으로서 나의 이미지를 설정하고, 언어를 배우면서 그 언어값에 해당하는 나의 특성을 내면에 아로새긴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나의 본질이 아니라 나를 둘러싸는 각각의 포장지일 수밖에 없다. 그 속에 진짜 나는 없는 셈이다.
화폐도, 국가도, 종교도 그 운영의 거시적인 원리는 위와 동일하다. 이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재해석한 들뢰즈를 비롯한 라캉주의자들의 생각이다. 한국에서는 정신분석학자 백상현이 대표적이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이번엔 '슬라이딩 퍼즐'을 떠올려보자. 슬라이딩 퍼즐이란, 가령 3×4=12칸의 숫자칸이 있고 한 칸은 비어 있어 뒤섞은 다음 1부터 11까지 제자리를 맞추는 2차원 퍼즐이다. 어릴 때 다들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재밌는 건, 슬라이딩 퍼즐이 퍼즐일 수 있는 이유는 1부터 11까지 피스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12번째 피스가 없기 때문이다. 즉, 12번째 피스가 공백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만약 12개 피스가 모두 채워져 있다면 퍼즐이 아니라 그냥 장식품이 되고 만다. 보통 우리는 퍼즐을 맞출 때 1번부터 11번 중 한 피스씩 옮기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피스와 비어있는 12번 피스의 자리를 맞바꾸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12번은 만능키인 셈이다. 모든 피스와 자리바꿈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반면 1번부터 11번까지의 피스는 서로 자리바꿈 할 수 없다.
위 원리를 그대로 화폐에 적용할 수 있다. 화폐가 바로 12번 피스와 같다. 그리고 모든 상품은 1번부터 11번 피스인 셈이다. 상품끼리는 교환할 수 없지만, 화폐는 그 어떤 상품과도 교환 가능하다. 의아하지 않은가. 똑같은 판매가격을 지닌 상품 A와 B는 맞교환되지 않으면서 그 가격만큼의 화폐랑만큼은 교환된다. 우리는 상으로 돈을 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 금액만큼의 물품을 받는 것은 선호하지 않는다. 슬라이딩 퍼즐의 작동 원리와 화폐 경제의 작동 원리를 위와 같이 견주어 볼 수 있다.
금본위제가 폐지되기 전까지는 화폐의 최정점(=중심)에 금이 자리하고 있었다. 금본위제가 폐지되면서 금이 있던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화폐의 중심은 이제 공백이 된 셈이다. 그런데 금이 사라지고 공백이 되면서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가 확실하게 정립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왕이 사라진 자리가 공백이 되면서 그 주변에 헌법과 3권 분립과 국민 기본권 등이 겹겹이 쌓이면서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 제도가 확립됐다. 전근대 국가의 최정점에는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이 없어지고 공백이 되면서 근대국가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들뢰즈의 발상이다.
백상현은 그보다 더 나아간다. 그는 신 자체가 완벽한 공백이라고 말한다. 신을 인격신으로 간주하는 것은 현 시대의 독특한 관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주일인 일요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하며, 신의 모습은 형용할 수 없기에 전통적으로 중세 미술작품에서는 신을 그릴 수 없었다. 신은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고 지칭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모방할 수 없다. 감각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말이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그런 뜻이었다. 신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우상이 되고 말기에. 종교는 신이라는 완벽한 공백을 가장 중심에 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주식투자자 중 기술적 분석가들에게 세력이라는 존재도 공백과 같은 것은 아닐까. 아무도 그들이 실존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정황적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그리고 세력이 있다는 가정 하에 차트를 해석하고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하여 투자하고 대응한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투자 기법이 개발되고 통용된다. 그렇기에 어쩌면 차트를 활용한 기술적 분석이란, 세력이라는 공백이 있기에 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만약 그들이 짠! 하고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 더 이상 차트 분석이란 불가능하게 되는 건 아닐까. 아니 아예 주식 시장에 대혼란이 오고 과거의 블랙 먼데이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허나 그 또한 허구적 망상인지 모른다.
Q. 어떠한 것이든 그 중심에는 확실한 실체가 있기에 질서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vs 중심이 없기에 어떤 질서든 새로 만들어지고 변하고 사라지고를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