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쉬워지는 방법들
기록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사람의 기억엔 한계가 있어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나를 알아가기 위해서…. 내가 기록을 시작한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아두고 싶어서. 언젠가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게 될 때, 그때가 왜 좋았는지 알고 싶어서.
재밌는 일도 해야 하는 일이 되면 하기 싫어지기 마련이다. 잘하겠다는 마음은 동력보다는 부담으로 남을 때가 많다.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도 찾아보면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훨씬 많고, 그저 쳐다만 봤을 뿐인데도 나는 저기까지 가지도 못하겠다며 겁부터 먹는다. 시작도 않고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잘하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저 나를 위해서 한다는 마음으로 기록하려고 애쓴다. 나를 즐겁게 만들기 위해,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잘해야겠다는 마음은 대체로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기인할 때가 많다. 소셜 미디어에 올리려면 글씨체도 예뻐야 할 것 같고, 스티커도 붙여줘야 할 것 같고, 그림도 멋스럽게 그려야 할 것 같다. 지금의 나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다. 그럴 경우엔 기록을 하려고 했던 원래의 목적을 되새긴다.
중요한 건 기록 그 자체일 뿐, 기록의 방식이나 보여주기에 마음이 기울면 주저할 이유만 많아진다. 그럴 땐 아예 보여주지 않겠다 다짐하기도 하고, 한 줄이라도 적었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기도 한다. 기록하는 동안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는다. 나를 위한 일을 타인과 비교하며 일부러 작아질 필요도 없으니까. 기록의 방식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기록한 내용이 내 것이어야만 고유하게 빛날 수 있음을 늘 주지한다.
일을 제대로 시작하기 위한 준비 과정은 끝이 없다. 기록의 도구는 무궁무진하다. 손으로 적을까, 아니면 디지털 방식으로 기록할까? 손으로 적기로 결심했다면, 어떤 노트를 써야 할지 하는 고민이 금방 돌아온다. 펜은? 틀릴 수도 있으니 연필이 좋겠지? 그럼 잘 지워지는 지우개도 필요해. 색연필도 있으면 좋을 것 같고….
마음에 차는 완벽한 준비의 순간은 오지 않는다.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 쓰는 동안에도 아쉬움만 눈에 보인다. 내 기록이 완벽하지 않은 이유를 찾게 된다. 펜의 개수가 남들보다 부족해서, 노트의 질이 좋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은 갖고 있는 게 나한테는 없어서….
그런 말은 합당한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기록을 포기하게 만드는 좋은 핑계가 될 확률이 크다. 이제 막 기록을 시작한 초심자의 실력은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잘할 수도 없을뿐더러, 쓰면서 길러야 하는 기록의 ‘능력’이라는 게 무엇인지 나조차 의문스럽다. 글씨 예쁘게 쓰기? 펜의 색깔을 조화롭게 사용하기? 메모지를 감각 있게 배치하기?
아무리 많은 도구를 준비하고 나보다 먼저 기록을 시작한 사람들의 노트를 보며 머릿속으로 연습해도 나의 노트를 펼쳐 내 이야기를 적지 않는다면 기록은 영영 시작되지 않는다. 완벽한 이야기를 적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노트를 망칠 준비를 하자. 노트를 망칠 준비는 거대하지 않다. 펜을 들고 무엇이든, 생각나는 이야기를 적기만 하면 된다.
개그우먼 김신영은 “애매한 날에 다이어트를 하는 걸 추천한다”고 했다. 월초, 월요일 같은 날을 기다리는 대신 아무 날에 시작하면 지킬 확률이 올라간다면서. 내게는 그 말이 ‘하기로 마음먹은 날 시작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다이어트처럼 기록도 새해 결심마다 따라오는 목표 중 하나다. 새로 산 다이어리는 1월 1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고, 중간에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시작하는 날을 다음 달 1일로 정해두고 그때까지는 기록을 하지 않는다면 다음 달 1일에도 기록을 시작하게 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어떤 일을 가장 시작하기 좋을 때란 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시작하기 가장 좋을 때는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이다. 그 순간의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뭔가 해보고 싶다고 결심했을 때, 그 마음의 동력이 꺼지지 않도록 지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 붙은 불이 오래 은은한 불빛을 유지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