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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님 Jul 06. 2018

무엇이 되길 바랐을까

나의 두 사람


가끔 궁금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자라 무엇이 되길 바랐을까.     


할아버지는 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무렵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내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우연히 올려다본 밤하늘의 달이 어찌나 밝은지, 그 달처럼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세상으로 나를 불렀다. 그런 거창한 뜻을 가진 줄도 모르고 여느 아이들처럼 방긋 웃곤 하던 나는 비록 세상을 환하게 하진 못했지만, 내 얼굴을 자주 내려다봤을 한 사람의 얼굴쯤은 환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내게 무엇이 되길 바라기보다는 무엇이든 되어도 좋다는 믿음을 주었던 할아버지와는 달리 할머니는 내가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통령이 되길 꿈꿨다. “네가 김 씨 가문을 일으켜야 해.” 송씨인 사람이 왜 김 씨 가문을 걱정하는지 모르겠지만, 여덟 살은 부모의 꿈을 제 꿈인 줄 아는 나이라 나 역시 대통령이 되고 싶은 줄 알았다. 어릴 땐 숫기가 없어 친한 친구 한 명 없던 나는 오로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동네의 웅변학원을 다녔다. 대통령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학원에 가기 전엔 할머니가 젓가락으로 톡 깨서 주던 날계란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에헴, 에헴. 웅변학원에선 가끔 작은 웅변대회를 열었는데 그때마다 나의 소원은 통일이 되었다가 어느 날은 갑작스레 북한을 타도해야 했다. 그래도 웅변 훈련 덕분인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게 좀 쉬워졌다. 그렇게 대통령의 꿈은 초등학교 중반까지 이어졌다.     


초등학교 4학년, 우연히 도 단위 글짓기 대회에 나갔다가 큰 상을 받게 됐다. 어린이날 기념 자유 주제 글쓰기 대회였다. 수상 결과가 발표되던 날, 수업이 끝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던 나를 담임선생님이 멀리서 불러 세웠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내게 선생님은 말했다.


“너, 글을 잘 쓰는 애구나.”


처음 들어보는 선생님의 칭찬이 듣기 좋아서, 대통령은 접어 두고 글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후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 대표로 크고 작은 글짓기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다. 사실 산동네로 이사 온 후로 줄곧 한 학년에 한 반뿐인 작은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학교 대표로 뽑히는 게 어렵지 않았다. 내게 기회가 온 건 글쓰기에 전혀 관심 없던 아이들 덕분이었다. 대회가 있는 날엔 선생님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 대회장 근처에서 외식을 했다. 그땐 할머니와 선생님의 기대를 받는 게 좋아서 자꾸만 글을 쓰고 싶었다. 새로운 원고지와 마주하는 일이 설레고 즐거웠다.     


하지만 한 학년에 200명이 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그보다 더 큰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글 쓰는 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용기 내 몇 번 참여한 공모전에서도 번번이 떨어졌다. 부끄럽지만 그런 이유로 의기소침해져 글 쓰는 일에 자신이 없어졌다. 세상엔 나보다 훨씬 잘 쓰는 사람들도 많았고 나만큼 쓰는 사람들은 더욱 많았다. 글 쓰는 일이 남들과 경쟁하는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런 생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점점 글을 쓰는 일이 어려워졌고, 결국엔 아무것도 쓰지 않게 됐다.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으면서

잘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

그게 나였다.     


어쩌면 나는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뤄서 단지 글을 쓰고 싶은 사람으로 머물고 싶었는지 모른다.

지역 방송국 막내 작가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작가라기보다 방송 일을 배울 겸 막내 스태프 역할에 더 가까운 일들을 했다. 방송국에 취직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할아버지는 방송국 로고와 내 이름이 새겨진 명함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난 네가 글을 쓰게 될 줄 알았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이상했다. 나는 정말 글을 쓰는 사람이 된 걸까.

방송국 막내 작가를 그만두고 들어간 두 번째 직장도 콘텐츠를 만드는 곳이어서 종종 작가라는 호칭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찔리고 불편했다. 사실 저는 작가가 아닙니다,라고 해명해야 할 것 같았다. 그 후로 글 쓰는 일과 점점 멀어질수록 글로 먹고 살진 못해도 글 근처에서 사는 삶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의 사서가 돼도 좋고, 작은 책방의 주인이 돼도 좋겠다고. 그러다 한동안은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잊고 살았다. 하루하루 해내야 하는 일이 정해져 있었고, 일에는 언제나 빠듯한 마감 날짜가 있었다. 마감 일을 기준으로 남은 날들을 지우듯 보내고 나면 하루, 한 달, 1년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렇게 어영부영 서른이 되었다.   

  

난 네가 글을 쓰게 될 줄 알았다.     

문득 할아버지의 말이 생각났다.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어떤 말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남는다던. 내겐 할아버지의 그 말이 그랬나 보다. 항상 미뤄 둔 질문 같았던 글 쓰는 삶에 뒤늦게 대답을 하고 싶어졌다. 그 뒤로 퇴근 후 두세 시간씩 카페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말에도 쓰고, 자기 전에도 쓰고,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도 틈틈이 썼다. 누가 주목해 주는 것도 아니고, 보여 줄 사람도 없었지만 글을 쓰는 일만으로도 하루를 견디는 위로가 됐다.      


현실에선 내가 나를 잊어야 삶이 편했지만,

글을 쓰는 동안은 온전히 내 삶에 집중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시간은 충분히 괴로웠고,

확실하게 행복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선 먼저 한 줄의 글이라도 써야만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도 비로소 와 닿았다. 계속 쓰다 보면 조금씩, 꼭 나아진다는 희망도 쓰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가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힘들여하는 걸까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의지가 나를 더욱 잘 살고 싶게 한다. 글을 써야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이 오히려 나를 자유롭게 한다.     


지금도 나는 글을 쓰고 있다.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글을 쓰는 삶을 살길 바란다. 카페에 앉아 며칠째 고쳐지지 않는 원고를 마주하며 생각한다. 언젠가 내 글이 누군가의 세상에 작은 빛을 켜 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서른 해 전,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할아버지의 바람은 이루어질지 모른다.


할아버지와 나








1.  책 <나의 두 사람>에 수록된 글 '무엇이 되길 바랐을까'입니다.


2. 안녕하세요, 여러분. 달님입니다. 다가오는 8월 3일 금요일 저녁 7시. 제주 모슬포항에 위치한 책방 <이듬해 봄>에서 소규모로 북콘서트를 하게 됐어요. 회사 휴가 일정에 맞춰 날짜를 잡느라 극성수기(!)에 제주로 가게 됐네요. :) 혹시 8월 3일에 제주에 머무르는 분들이 계신다면 이듬해 봄으로 놀러 오세요. 작가와의 대화, 독자 이벤트, 단도리x이수잔(아래 동영상 참고)의 공연도 준비되어 있답니다. 제주의 여름 밤, 작은 책방에 모여 <나의 두 사람>을 함께 이야기해요. *문의는 2046kino@naver.com 으로 주시면 답변 드릴게요. 


지난 유월, 창원에서 열린 북콘서트
단도리x이수잔 <우리는 마치 등을 기댄 사람들처럼>



https://brunch.co.kr/@20150127/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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