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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런 거까지 기억하나 싶을 정도의 것들을, 특히나 기억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는 것들을 남들보다 많이 기억합니다. 사람은 안 좋은 기억부터 머리에서 지운다는데 어째서 제 안엔 그 기억들이 파편들로 남아있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가장 최초의 기억은 4-5살, 말도 제대로 못 할 시절 가스레인지를 뚜들기며 엄마에게 라면을 끓여달라고 하던 장면입니다. 그때 살던 집의 구조와 가스레인지의 높이, 색깔까지 모두 기억납니다. 그 이후로도 유치원 차량에서 처음으로 멀미를 겪던 일, 때문에 집에 와서 이불 위에 게워냈던 장면, 그 이불의 모양, 그날 먹었던 점심 메뉴, 어릴 적 다니던 학원의 푸세식 화장실 똥통에 빠질 뻔한 일, 그때 신었던 신발, 전봇대에 붙어있던 실종자 전단지, 학교를 마치고 학원을 가던 길에 짖던 표정, 친구의 귓속말, 따돌림을 당하던 일, 복도에서 발을 걸던 녀석들의 얼굴, 넘어지던 감각, 뒤늦게 친구에게 받은 사과의 편지 내용, 그 순간 함께 걸어 들어가던 교문, 인터넷 세상에 빠져있던 나이, 어두운 방, 그곳에서 듣던 노래, 비밀을 들켜버렸던 일, 처음으로 사랑에 실패했던 순간, 그날의 공기, 주고받던 메시지, 찾아왔던 통증, 무기력하던 기분까지 세세하고도 생생합니다.
특히 어떤 음악과 향기는 더욱 그날의 기억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치 제가 그날로 다시 돌아간 듯 눈앞에 장면이 그려지곤 하죠.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런 기억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입니다. 아무 상관없는 일상 속에서 갑자기 창피했던 일이 떠오르거나, 길을 걷다가 옛날 실연의 아픔이 밀려오는 것처럼요. 마치 누군가 제 머릿속 서랍을 마구 뒤적이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멈춰 서서 한숨을 쉬고, 그 기억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때로는 이런 기억력이 저주처럼 느껴집니다. 남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들이 제게는 선명한 채로 남아있으니까요. 상처도 더 오래 아프고, 부끄러움도 더 오래 따라다닙니다. 마치 제 마음속에 치유되지 않는 상처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것 같아요.
추억과 기억은 엄연히 다릅니다. 추억이라는 말을 미화된 기억에 붙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무리 저주의 기억력을 가진 저라도,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거든요. 추억 그 단어엔 그만큼의 힘이 있어서 저는 종종 추억 속에 살고는 합니다. 요즘 들어서는 이런 제 기억력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들이 잊어버린 작은 순간들, 사소한 감정들까지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때로는 소중하게 느껴져요. 제 안에 있는 모든 기억들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픈 기억들조차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를 알려주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결국 기억은 짐이면서 동시에 선물인 것 같습니다. 무거운 짐처럼 어깨를 누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제 기억들을 지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아마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보관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순간들을 통해 지금의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 머릿속 가득한 기억의 파편들이 조금은 덜 무겁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