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 1.
여행은 소비 병에 걸린 내가 돈도 쓰면서 잡생각 없이 정신도 빼놓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핑계였다.
급히 1박 2일의 제주도 일정을 잡았다. 숙소와 렌터카만 예약해두고 짐은 출발 전 날 저녁이 다 돼서야 보이는 대로 가방에 욱여넣은 채 다음 날 아침 여행길에 올랐다.
미리 준비하는 법이 없는 내게 스마트폰은 현시대 최고의 발명품이 아닐까. 물론 이번 여행에서도 계획 같은 건 없었다. [맛집] 검색 한 번으로 주변 위치부터 메뉴, 사진, 후기까지 다 알 수 있으니 스마트폰 하나와 돈만 들고 가면 걱정이 없었다. 무작정 제주에 도착해 보니 비가 올는지 습기에 흠뻑 젖어 어항 속의 물고기가 된 느낌이었지만 친구가 내 시간에 맞춰 연차를 사용해준 덕에 여행 메이트도 생겼겠다, 코로나 이후 오랜만의 여행에 그때까진 아무렴 좋았다. 그때까진….
렌터카를 픽업하고 밥을 먹자마자 바람이 무척 거세지고 비가 내려서 우린 숙소에 먼저 들러 짐을 놓기로 했다. 두 체력 거지들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은 꿈에도 모른 채 침대에 누워 꿀맛 같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앞으로 어딜 가야 할까 저녁엔 뭘 먹으면 좋을까 하는 고민도 잠시 일단 제주도에 왔으니 바다를 보러 가줘야 한다며 나섰고 친구가 운전대를 잡았다. 주차장에서 빠져나가려는 순간 뒤통수를 때려 맞는듯한 소리가 나면서 우린 동시에 얼어붙었다. 실제로 그것과 맞먹는 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무시무시한 충격음은 우리의 100만 원이 나가는 소리… 아니 정확히는 친구의 100만 원이 빠져나가는 소리였다. 문을 열고 뛰쳐나가 보니 주차장 돌담에 부딪힌 뒷좌석 범퍼가 화려한 스크래치를 뽐내며 움푹 들어가 있었다. 혹시 모른다며 들어놓은 계약서 내 보험정보를 그제야 샅샅이 읽어봤지만 다른 차와 사고 난 것이 아닌 단독사고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단다. 아찔했다. 친구는 아마 저기 보이는 파도 같은 눈물이 앞을 가렸을 것이리라….
우리는 무한 긍정 회로를 돌렸다. 다른 차에 갖다 박지 않은 게 어디냐. 사람 안 다쳤으니 다행이다. 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지만 불쑥 다시 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가라앉는 텐션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엉덩이가 찌그러진 차를 끌고 우린 여기저기 잘도 다녔다. 해안 도로도 달리고 바닷물에 발도 담가보고 풍경이 좋은 곳에서 밥도 먹고 카페도 가고….
아, 제주에 가는 이들에게 한 번쯤 전시를 보러 가길 강력히 추천한다. 언제부턴가 제주에 가면 꼭 전시를 하나씩 보고 오게 되었는데, 서울에서는 전시를 보러 갈 때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놀라고, 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목적이라기보단 그들의 셀피 존 같은 느낌이 강해서 시야에 방해가 되거나 심하게 정체되는 게 항상 아쉬웠다. 제주에는 건물 자체가 작품인 곳도 여럿 있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좋은 전시를 서울보다 훨씬 여유롭게 볼 수 있어서 좋다.
이틀째 날엔 그렇게 아침부터 전시를 두 군데 돌았다. 전시로 하루를 채우며 마지막은 역시 고소한 흑돼지를 맛봤다. 반드시 든든하게 배를 채워야만 했다. 결정적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우린 렌터카 업체에 차를 반납하며 눈물의 경위 파악을 하고 그녀의 황금 같은 100만 원은 카드를 통해 수리비로 결제되었다. 사고처리로 시간을 보내느라 비행기 시간이 임박해졌고 우리는 마음이 조급해 발을 동동 굴렀지만 다행히 그 사고 외에는 별 다른 일 없이 제때 안전하게 육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확실히 여행을 하면서는 리프레쉬가 되는 느낌을 받았으나 여행이 끝난 후 현실 복귀가 미치도록 싫었다. 여행이 플러스(+)라면 현실 복귀로 인한 스트레스가 마이너스(-)로 역효과를 발휘해 결국 제로(0)에 수렴한달까. 그래도 웃지 못할 해프닝과 추억을 만들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아, 참고로 수리비는 여행에서 돌아 온 이후 친구의 개인 보험으로 처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