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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신 Sep 05. 2022

2. 셀프 진단서







내 증상들을 대충 정리하자면 이렇다.



무기력

호흡 불안정

불안감

수면장애(너무 잠이 쏟아지거나 너무 잠을 못 잠)

소화불량

부주의

심한 건망증

충동성

머리에 안개가 낀 느낌

회피 성향 심해짐





불안감은 과호흡과 짝꿍처럼 손을 잡고 붙어 다녔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저 뱃속 깊숙한 데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하면 곧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또 무기력이라는 한 놈은 나를 땅 끝까지 잡아당겼다. 내가 왜 이걸 해야 해? 하는 생각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머지 그런 생각조차 하기 싫었으니까. 그렇게 하데스에게 붙잡혀 지하세계로 끌려간 페르세포네처럼 무기력함에 무기력하게 끌려간 나는 하루 종일 자도 자도 잠이 쏟아졌다. 회사에서 근무하는 시간 외에는 쉬는 시간에도 지하철에서도 버스에서도 머리만 대면 잠에 들었다. 이토록 몇 날 며칠을 비몽사몽에 살다가도 또 한동안은 잠을 이룰 수 없어 4일간 10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벌건 눈으로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수면장애는 뇌세포를 갉아먹는 건지 건망증이 심해졌고 부주의의 노예가 되었다. 물건을 두고 다니거나 잃어버리는 일은 부지기수고, 지하철에서 멍 때리고 있다가 내릴 곳을 놓쳐 다시 돌아가느라 약속에 늦는다든지, 회사 출입증을 놓고 와서 택시비를 날려가며 다시 집에 다녀온다든지, 업무 중에도 실수 범벅인 데다가 몇 번을 다시 체크해도 실수를 잡아내지 못했다.

한 번은 퇴근 후 운동을 예약했는데 잠깐 짬이 나는 그 새를 못 참고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잠이 쏟아져 알람을 맞춰두고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웬걸 늦잠을 자버린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오후 7시 알람을 오전 7시로 잘 못 맞춘 것이었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뛰쳐나갔으나 그 와중에 지갑을 놓고 나와 운동 한 회차를 날려먹고 지하철역까지 화장실만 갔다 온 사람이 되었다.

까먹지 않기 위해 한 메모도 소용없었다. 내가 메모했다는 일 자체를 잊어버렸으니까.


작은 것 하나까지 놓쳐버리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스트레스를 풀겠다는 명목 하에 신용카드에 기대어 입지도 않을 옷을 왕창 사놓고 결국 계절이 지난다거나, 먹지도 못할 음식을 왕창 시켰다가 다 버리거나, 불필요한 생필품을 대량으로 사들여 좁디좁은 원룸이 터져나가기 일보 직전이었고 잃어버린 자제력은 카드값의 낭떠러지로 나를 밀었다.

친구들은 나더러 왜 이리 극단적이냐고 했다. 한 번 잃어버린 자제력은 충동성을 억누르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이유 모를 짜증이 솟구쳐서 샤워하다 말고 가위를 가져와 셀프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어느 날은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기존에 저장된 번호를 지워버린 채 인간관계를 끊어버렸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생각은 생각을 낳았다. 부정적인 생각의 꼬리를 질질 끌며 절벽에 서서 스스로를 향한 비난의 화살까지 때려 맞고, 비로소 나는 내가 정말 싫어졌다.











사실 그동안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ADHD나 우울증이라고 하기엔 정도가 약한 것 같았고 일은 내가 선택한 것이니 그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요즘 안 바쁜 사람 하나 없는데 직장 생활하다 보면 다 그런 거지 뭐, 하며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번아웃 직격탄을 맞아보니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원래 사람은 내가 겪어보지 않은 일은 다른 세상의 일처럼 치부해버리고는 하잖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동은 둘째치고 수면장애에 소화불량에 두통을 달고 살게 되니 이거 이대로는 안 되겠다,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겠다 싶었다.


먼저 원인을 분석해 보았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일단 내 의지와 관계없이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스케줄 근무 종사자로서 밤이고 낮이고 평일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일을 했다. 보통 패턴은 '3-4일 근무 후 하루 휴무'와 같았는데 오후 출근을 했다가 새벽 출근을 했다가 종일 근무를 하는 등 근무 시간이 일정치 않았기에 잠은 잘 수 있을 때 자고 밥도 먹을 수 있을 때 먹었다. 때문에 체력적인 소모가 컸다. 시간이 맞지 않아 일주일에 두 번 운동을 가는 것도 어려웠고 여가 생활은커녕 한 달에 한 번 가족들 보러 가는 것도 힘든 서울살이 독거 직장인은 별 다른 취미도 없이 일과 집만을 반복하다 그대로 일에 잡아먹혀버렸다.   


혼자 있을 때 주로 증상이 발현됐기에 새벽 근무가 끝난 오후나 휴무인 날은 어떻게든 약속을 잡아 밖으로 나돌았다. 몸을 굴려 정신없게 만들면 잡생각 할 틈이 없어질 테니 그러다 보면 모든 게 잊힐 거라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효과를 오래 발휘하지 못한 방법이었으나 나는 어디로든 떠나기 위해 급히 여행 일정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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