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마시고, 걷고, 먹고
유월에는 제주에 가자.
내가 태어난 달에 어떤 마음의 소비도 하지 않는 여행을 하자고 정한 건 아니지만 특별히 다른 여행이 잡힌 게 아니라면 제주를 간다. 2018년의 유월이 절정이었다. 입만 열면 '괜찮다'를 할 때였는데, 지인이 쏘아 올린 작은 말 한마디를 시작으로 15분 만에 항공권 결제를 마친 것이다. 가족과의 약속, 친구들의 모든 약속을 펑크 내는 여행이었는데, 지인들이 되려 잘 다녀오라며 다독일 때였다.
누군가에게 제주란 서핑이고, 관광이고, 등산 같은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만 내게 제주는 그저 쉼이다. 좋아하는 동네는 구좌읍. 평대와 세화, 한동에 이르기까지 고요하고 복잡하지가 않다. 처음보다는 사람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복작복작한 곳에 비하면 한가한 편이다. 7-9월까지 성수기에 가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다. 쉬려고 가기 때문에 꼭 읽어야 하는 책 한 권 정도를 들고 가려한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여행 내내 먹고, 걷고, 마시고, 걷고를 반복한다. 구간도 일정하다. 세화 해변에서 명진전복을 지나 평대 해변까지. 대략 2.8킬로 정도 되는데, 가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종종 세화에서 하루를 보내고 평대에서 하루를 보낸다.
친구의 플레이 리스트는 중구난방이지만 모든 곡들이 친구를 닮아 센스가 있다. 그래서 제주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내 플레이 리스트에 한 두곡은 추가된다. 이 플레이리스트가 가장 빛나는 시간이 걷는 순간이다. 대부분 렌터카로 오가는 길이고 들을 이 없이 갈매기만 나는 한가한 길이라 친구의 음악 소리를 조금 키워도 누구에게 민폐가 아니기 때문이다.
굳게 닫힌 문 뒤로 친구가 자고 있다. 아마도 두세 시간 정도는 내 시간이다. 두 어번 와서 퍽 익숙한 공간에 익숙한 음악들을 틀어놓고, 나만의 시간을 위해 공들여 간식을 늘어놓는다. 시간은 일곱 시쯤 됐을까. 사놓고는 일 년 동안 읽지 않은 책을 읽기로 했다. 사춘기 때 내게 가장 강렬한 단편소설 '새의 선물' 은희경 작가의 작품이다.
오랫동안 장편을 읽지 않아서인지 영 진도가 안 나간다. 세 장쯤 읽다가 내가 뭘 읽고 있었나 다시 돌아왔다가 그냥 문자를 읽기로 한다. 속독인 편이라 금세 다 읽고는 한 번을 더 읽었다. 비효율적인 독서법이다. 책도 다 읽었고, 안개가 잔뜩 껴 해가 떴는지도 아른하다. 삼각대를 챙기고 어제 산 모자를 쓰고 잔뜩 부은 얼굴을 해서는 사진을 찍기로 했다. 내가 생각한 피사체는 아니었지만 내년에 보면 한 살 어린 내가 제법 괜찮아 보일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찍기로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저 먹고 마시고 걸으며 쉬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왜 매 분초 뭔가를 하고 있는 걸까. 누구보다 격렬하게. 어느 해인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하자며 회사 선배와 여행을 가서는 자수를 가르쳐드리고 왔다. 나는 그런 게 안 되는 사람인가 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고 어느 순간이 되면 나는 제주를 떠올린다. 그 날의 휴식이 어쩔 수 없이 무엇인가 하긴 하지만 결국에는 쉼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유월이 오려면 아직 긴 시간이 남았지만 이런 한가한 제주여행이 좋은 계절, 겨울이 오고 있으니 날짜를 한번 잘 따져봐야겠다. 새로운 직장, 삶이 흐르고 있으니, 한 번은 쉬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