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다보면 압도적인 석양이 머물던 곳
2015년에 풍요로운 여행을 많이 했다. 겨우 사 년 전인데 까마득한 기분이 든다. 그때의 풍요로운 시간을 지나 나는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작아진 숨통으로 겨우겨우 숨을 쉬었던 것이다. 첫 번째 회사에서 십여 년을 보냈는데, 놀라울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 월급이 안 나오고, 임원으로 부터 갑질을 당하고, 영어 알못이면서 수많은 해외출장을 다니고, 많은 후배가 생기고, 관리자가 되고, 관리자에서 내려오고. 사실 그 모든 일들이 나를 위태롭게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나는 숨을 죽이고 사는 법을 배우다 보니 숨통마저 작아져 아주 작은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새로운 직장에서 숨을 크게 쉬는 법을 배우고 있다. 사람들은 내게 무엇이든 잘한 다해 주고, 나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어제도 중요한 일을 하기 전에 숨을 크게 쉬었다. 한숨과는 다르게 깊고 폐를 한껏 부풀리는 심호흡이었다.
나의 첫 통영 사진은 솟대로 시작한다. '그 달, 어딘가'로 일컫는 이 글의 시작은 솟대였다. 수호신 혹은 소망의 상징인 이 가냘프게 선 솟대가 나는 언제나 간절하고, 예쁘게만 보인다. 한 때 책을 내고 싶다고 표지를 만들 때도 솟대를 모티브로 했던 걸 보면 나는 진심으로 좋아한 듯하다.
이렇게 문득 통영의 사진들을 보고 있으니 한 필름에 이렇게 다채로운 풍경을 담을 수 있나 싶다. 물론 아름다운 바다와 항구도 그렇지만 통영의 귀여운 미술관이나 근대 마을, 흐드러지게 핀 장미와 초록 초록한 숲길. 이 모든 곳이 통영이라니.
빛이 가득 들어오는 이 아름다운 숲
청아한 물빛의 항구.
흐드러지게 핀 붉은 장미.
백문이 불여일견. 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가끔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다 보면 디지털로는 구현하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물론 굉장히 무겁고, 굉장히 비싼 DSLR은 구현하겠지만..) 검은 막에 빛을 새겨 그 날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필름이 주는 감동이 있다. 물론 이제는 몹시 비싸고, 귀찮은 취미가 되었지만 돌아보면 결국 애정 하게 하는 한 장면은 필름 카메라의 한 컷일 때가 많다.
이 사진들을 찍은 니콘 F-501은 흔한 카메라가 아니라는 장점도 있지만 나를 처음 찍은 카메라이고, 아버지에 내게 물려준 가장 의미 있는 유산이다. 아버지의 취미를 남매는 나란히 나눠 가졌는데, 낚시는 아들이 카메라는 딸이 물려받았다. 그 취미는 자식들이 힘든 순간마다 찾게 하는 위로가 되었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아버지는 이 카메라를 참 애지중지 예뻐하셨는데, 아버지 덕에 풍요로웠던 나는 좀 거칠게 이 카메라를 다뤄 어느 날 보니 금이 가있더라.
여행을 하며 산행이든 오래 걷기든 힘든 건 주저하는 내게 케이블카에 내려걸었던 산길과 마침내 만난 석양을 기억한다. 우리는 그 산의 정상에서 빨갛게 익어 결국은 바다로 사라진 해를 끝까지 보았다. 이제는 안다.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십 년의 끝에 새로운 일 년이 시작되고 그 해는 반대편 산이든 어느 길 끝이든 솟아올라 다시 질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통영과 아버지의 유산이 나를 풍요롭게 했듯이, 앞으로의 여행과 삶 또한 이 날과 같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