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에 화가 나는가.
얼마 전에 드립용 휴대 커피를 선물 받았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일본에서 사 오는 UCC 커피가 특별했는데, 지금은 동네 카페에서도 드립용 휴대 커피를 판다. 어쨌든 선물의 이유는 '비행기 티켓을 저렴하게 구매'하셨다는 것. 어린 시절부터 온갖 국내여행, 자라서 간헐적 해외여행까지 계획을 짜고 실행하는데 몹시 익숙하다. 패키지여행으로 단련된 그분께는 신기하고 낯선 일이었겠지만.
그런 내게 '아무 계획 없던' 첫 여행은 방콕이었다. 비행기에서 읽을 방콕 여행서 한 권을 들고, 회사 일에 지칠 대로 지친 그녀와 나는 아무 계획 만이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호구'스러운 여행은 아마 두 번 다시없으리라.
무거운 니콘 F-501 카메라를 들고, 뜨거운 방콕에 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즐거웠지만 사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방콕은 다시 가지 않을 거야'를 세 번은 웅얼거렸다. 돌아오는 비행기가 제법 한산했지만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어쩌면 분노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몇 년 후 다시 방문해서 그 여행의 악몽을 씻어냈고, 나는 여전히 그때의 감정이 남아있는 듯하다.
우리의 첫 사기는 툭툭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랩이니 우버 같은 것이 없는데, 자꾸 택시 기사들이 미터는 안 쓰겠다 하고, 택시비를 아는 우리는 몹시 마음이 상했으므로 툭툭을 탔다. 아무 계획이 없는 우리에게 그가 굉장히 선심을 쓰듯 주요 관광지를 돌겠다더니, 처음에는 기프트샵에 데려가고 그다음에는 귀금속점에 데려가는 게 아닌가. 별 관심 없이 후루룩 보고 나왔더니 되려 우리에게 화를 낸다. 성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첫 여행 첫 관광은 이렇게 망했다.
택시를 탈 때마다 마음은 상하고, 그래도 툭툭에 덴 것이 있으니 택시를 타긴 타야겠고 그렇게 두 번째 사기가 벌어졌다. 방콕의 유명한 '쏨분 시푸드'를 가기로 했는데, '쏨분 디 시푸드'를 데려간 것. 지금도 웃음이 나는 게, 방콕에서 뿌 팟퐁 카레를 시가에 먹은 이 얼마나 될까. 우리처럼 사기당한 사람들이 먹었겠지. 아이러니하게도 사기는 쳤지만 음식은 제대로라 정말 이 날 먹은 황홀한 뿌 팟퐁 카레는 내게 방콕 최고의 식사로 남아있다. 물론, 가격도 최고로 남아있다. 우리가 방콕에서 내내 쓰려고 했던 돈이 1인 30만 원이었는데, 식사 가격이 1인 8만 원이었으니 헛웃음이 날 뿐. 나는 왜 원피스를 살 때 겨우 20밧(당시 600원 정도)을 아끼려고 노력했는가.
그렇게 내내 우리는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잊지 못할 사기를 당한다. 방콕은 은근 행사가 많아서 왕궁이 문을 열지 않거나 술을 팔지 않거나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방콕 왕궁 앞에는 상시 '문을 열지 않는다'며 사기를 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보가 많으니 걸리는 사람이 있겠냐 싶은데 바로 우리였다. 나름 여행 마스터라며 친구 여행도 짜주면서 본인 여행들을 이렇게 다녔다니 실소가 난다. 어쨌든 볼만한 왕궁으로 데려다주겠다는 사람들을 사기라고 뿌리치고는 거리에 나와 다른 툭툭을 탔는데(그놈이 그놈) 하얗고 예쁜 어딘가에 우릴 내려주는 것이 아닌가. 입장권을 샀는데, 그들이 말했다. '너희는 치마를 사야 해' 우리는 왕궁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복장으로 맞춰 나왔기 때문에 기가 막혔다. 그리고 우리는 폭발했다. 그들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 너희 한국에서 왔지? 거긴 잘 사는 나라인데 왜 우리한테 돈을 안 쓰려고 하니.
나보다는 영어를 잘하는 그녀와 설전을 한참 하다 우리는 환불도 안된다는 입장권을 던져버리고 나왔다. 나오는 길 지금까지 당한 에피소드들이 떠오르며 조금은 시원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다. 나는 무엇에 화가 났는가. 그때는 우리를 '호구' 취급한 그 많은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들에 화가 난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한다. 나는 어리석게도 예상하는 일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누구보다 크게 놀라고, 크게 실망하고, 크게 화난다. 나이를 먹다 보니 좀 더 누그러지는 부분도 있긴 하다. 노래 제목처럼 '세상은 요지경'이고,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일 때가 되긴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