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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Mar 29. 2018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연출가의 삶 | 나의 삶에 ‘진짜 나’는 없고, ‘만들어진 나’만 있었다


요리해주기 싫으면 안 해줘도 돼



이 소리에 나는 적잖게 당황한 듯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는 것만큼 적극적인 사랑 표현이 또 있을까. 나는 진정 당신을 사랑했다.

  

미역국과 김치찌개...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은 당신을 쏙 빼닮은 소박한 것들이었다. 고기를 볶고 참기름을 붓는다.

고소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메운다. 음식을 입안 가득 넣고 웃는 당신 모습. 누군가 볼세라 맘껏 웃진 못하고 애꿎은 입만 쌜쭉거린다. 괜스레 손놀림은 더욱 빨라진다.


그럼에도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다. 이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나더러 표정이 굳어 있단다. 무서운 표정, 예민한 신경들 그리고 짜증까지. 당신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분명 나는 차가웠다. 이런 내가, 나조차도 이해되질 않는다. 분명 맘에서 우러나와하는 일인데, 왜 그 우러나온 마음이, 속마음이 겉으로 나오질 않은 걸까. 부끄러워서였을까? 아님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이까짓 것쯤은 별거 아니라고, 늘 먹던 밥상 위에 수저 하나만 더 얹은 것뿐이라고 퉁명스럽게 전하고 싶었던 걸까?



           

연출. 나

각본. 나


나의 인생이 하나의 드라마라면, 나는 보여주고픈 면만 보여주며 살고 있다. 초라하거나 낡고 보잘것없는 면은 철저히 숨긴 채. 당당하고 솔직하고 강한 면만을 보여주려 애쓰는 상태. 그렇다. 나는 부단히 애쓰고 있다. 간혹 이런 면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알아본다. 이 드라마의 허점들을.


나는 그것을 알아채는 사람을 좋아했다. 빈틈이 많았던 터라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나의 실체를 몰랐다. 빈틈은 나에게 못난 면이었다. 나의 빈틈만을 콕콕 집어내는 사람 앞에선 속수무책 무너지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그런 상대 앞에서 무너지는 내 모습이 참 좋았다. 애써 숨긴 모습이래도 아주 몰라주길 바란 건 또 아닐 테니까.



‘날 알아봐 주세요’



혹자는 내게 자신을 조금 더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조금 더 솔직해지라고 말한다. 당당한 척, 강한 척, 솔직한 척, 상처받지 않은 척… 온갖 '척' 좀 하지 말라고.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다.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했던 때가 있었다.


안타까울 정도로 미련한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덕분에 살아오면서 세 번의 큰 배신을 당했다. 그 세 번은 나의 세계에서 단순히 점 세 개가 아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가늘고 긴 실선으로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줘야 하는 (것으로 기대되는) ‘엄마’라는 사람에게 한 번, 이런 상처를 나누고자 이야기했지만 왜곡하며 나를 조롱했던 ‘옛 연인’에게 한 번, 진실한 친구인 척하며 사람들에게 이간질하던 한때 ‘친구’에게 또 한 번…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잘못한 거라지만, 두 번부터는 얘기가 달라진다. 그때 이후론 속는 사람, 믿은 사람이 소위 ‘병신’이었다. 나의 죄명을 굳이 명명하자면 한없이 사람을 믿었던 ‘미련 죄’ 정도 되려나. 마음을 열어보려던 지난 몇 번의 시도는 나를 ‘연출가의 삶’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연출가로 학습된 내가 연기한 이번 드라마에서 맡은 역할은 ‘덜 사랑하는 척’이었다. 불행하게도,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주는 것에도 익숙지 않다. 애정표현이 서툴고 어려워 가능하면 그 상황을 피하고 싶어진다. 불행 중 다행은 이런 유의 사람도 무언가 표현을 하긴 한다. 다만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뿐이다. 감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인공지능 로봇처럼, 어딘가 어색하게 혹은 불편하게.




이제야 모든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당신이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나를 밀어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제 머리로 알았으니 마음을 고쳐먹으면 될 터. 그런데 나는 또다시 연출을 한다. 보여주고 싶은 면만을, 혹은 보아주었으면 하는 나의 특정한 면을 조금 더 부각시켜 행동한다.


글러먹었다. 타성에 젖은 지금의 상태가 도무지 고쳐질 것 같지 않다. 내가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삶에 ‘진짜 나’ 대신 ‘만들어진 나’만 있었다. 언제부턴가 ‘진짜 나’는 외로움에 잔뜩 움츠러든다. ‘진짜 나’는 다짐한다. 만일 누군가에게 온전히 솔직해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을 절대 놓치지 말아야지. 이런 나를 알아봐 주고 다독여준다면 그 사람 앞에서 엉엉 울어버려야지. 그때가 온다면 기필코 거추장스러운 ‘만들어진 나’를 밀어내리라.


모락모락 김이 나는 식탁. 당신은 숟가락과 미소를 함께 들어 보였다. 맛있다며 씩씩하게 숟가락질하는 당신을 붙잡고 나 또한 온몸으로 웃는다.



당신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참 행복하네요



나는 더 이상 숨지 않는다.

다칠까 겁내지 않는다. 

내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낼 것이다. 


이제 상처는 없다.




@Yogurt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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