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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Apr 05. 2018

설렘의 다른 말, 두려움

우리가 만난 지 이틀 째. 나는 당신과 헤어지고 싶어졌다.

우리 만나볼래요?


이 한 마디로 두 남녀는 달라졌다. 말없이 손을 잡아도, 혹은 입술을 훔친대도 성추행이 되지 않았고, 누군가 상대방에 대해 물어본다면 ‘남자(여자) 친구’라 당당히 말할 수도 있는 관계가 된 것이다. 순간마다 느끼는 감정들을 맘껏 발산할 수 있는 때. 이맘때 두 남녀의 눈빛은 늘 영롱하다. 한 여자만 제외하고는.


그녀는 새로운 시작이 주는 설렘을 마주할 때면 속이 거북하다. 난데없이 불어온 모래바람에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서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낸다. 기어이 모래 한 알을 빼낸 후에야 발걸음을 뗀다. 빼내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땐 눈으로 꿀꺽 삼켜버린다. 벌게졌던 눈은 이내 평온해진다.


생각해본다. 드라마 속에서도 또 카페에 앉은 연인들도… 모두들 일시적인 설렘을 조금이라도 연장해보겠다며 난리들인데, 왜 이 여자는 설렘이 싫다 할까. 정말 ‘설렘’이 문제일까.


어느 날 갑자기 삶에 ‘침입’한 새로운 무언가. 그녀의 하루가 송두리째 변했고 그녀는 그 침입자에 거부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침입자는 때론 사는 곳이 되기도 직장이 되기도 또 대인관계가 되기도 했다. 그녀에게 새로운 것이면, 침입자의 요건을 갖추기 충분했다. 예측 가능하던 자신의 일상에 예측 불가능한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 심장이 뻐근했다. 학창시절 두 번의 전학과 거주 지역을 네 번을 옮겨 다닌 탓일까. 그녀의 인생에서 ‘적응’은 큰 과제였고 난제였다. 그중 난이도 상에 해당되는 문제는 단연, 연인이었다.


‘이 사람은 왜 이러는 거지?’

‘왜 연락을 안 하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이런 반응은 뭐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자신 못지않게 여러 생각을 할 줄 아는 자아를 상대하는 일. 이것보다 예측 불가능한 일이 또 있을까. 다음을 예측할 수 없기에 그녀의 레이더는 늘 작동 중이었다. 눈동자는 쉴 틈 없이 움직였고, 허투루 정보를 흘려버리지 않기 위해 한껏 날 선 촉수로 만전을 기했다. 누군가는 이 과정에서 설렘을 발견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그녀는 그 설렘이 불편했다. 설렘.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긴장감. 언젠가부터 그녀의 심장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두근거림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불쾌했다.


‘내가 왜 이래야 하지.

그만하고 싶다, 도망가고 싶어

혼자 있고 싶어’


평정을 깨버린 타인의 존재는 그녀에게 불청객이었다. 공식적인 관계를 시작하기 전에는 아무렴 상관없다. 그녀의 삶에 깊숙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 이때는 두 사람 사이의 구속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강하게 요구하지도, 또 그에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할 의무가 없는 ‘애매한 관계’. 


세상의 눈에 그녀는 ‘자유분방한 여자’였고, 때론 ‘나쁜 여자’라고도 불렸다. 그들은 그녀의 속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단지 오답일 뿐이니까. 그녀가 의도를 했건 안 했건, 악의가 있었건 없었건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도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남을 사람은 남게 마련 아닌가. 갈수록 그녀는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피로감은 쌓여만 갔다.



그녀에게는 그저 시간이 필요했다. 적응할 시간. 그동안 주변 것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 단 그녀를 밀어붙이지 않는 게 포인트. 자연스레 그들의 삶에 그녀가, 그녀의 삶에 그들이 녹아들 충분한 시간이다. 투명하고 잔잔하던 물속에 검은 물방울이 톡하고 떨어진다. 갓 들어온 물방울은 물속을 헤집어가며 검은 형체가 불안한 듯 너울거리지만, 그것도 잠시. 물은 새로 들어온 한 방울을 기꺼이 집어삼키고 다시 고요해진다.


그녀도 알고 있다. 마음을 다독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어떤 이질감에 불안감이 용솟음칠 때마다 회피보단 큰 숨을 몰아쉬어야 한다는 것. 그런 그녀에게 언젠가부터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바로 ‘눈으로 시간흐름 살펴보기’. 어떤 대상과 초반의 서먹함을 견디지 못하는 그녀는 계속해서 시간을 살펴본다.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속 일렁임도 잦아들기에 시간 앞에 간절해졌다. 형체 없는 시간을 관찰한다. 책으로 또는 머리카락으로. 


시계 대체용품1) 독서

새 책을 사면 한 동안은 쉽게 손을 대지 못한다. 이 역시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이 동하기 시작하면 책장을 넘겨보지만 이내 덮어버린다. 읽다 말고 어느 정도 읽었는지 지난 페이지를 훑기도 한다. 손때가 묻은 부분이 아직 적다. 술술 읽히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손에 베일 듯 새하얀 종이가 눈에 더욱 띈다면 그녀는 한숨을 쉬고 만다. 언제쯤 익숙해질까 생각하면서. 고지가 눈에 보이지 않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다음 챕터까지만 버텨보자고 목표를 수정해본다. 그렇게 하나둘 넘어서는 목표가 늘어나게 됐을 때 그녀에게 다음 목표는 필요 없어진다. 어느새 그녀는 책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시계 대체용품2) 머리카락

그녀는 머리가 노랗다. 날이 갈수록 본래 검은 머리가 나온다. 평상시엔 빨리 자라던 머리가 어째 이번엔 더디게 자라는 것 같다.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다는 의미다. 어서 불편한 초기를 지나 익숙함의 때가 오기를 괜한 머리카락에 간절히 바라본다. 식물에 물을 주면 무럭무럭 자라듯 머리카락도 그렇지 않을까 하여 하루 두 번 머리를 감는다. 머리를 말리고 검은 머리가 얼마만큼 내려왔나 거울을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눈썹과 나란히 있던 어제. 오늘도 눈썹과 사이좋게 나란하다. 아니, 어쩌면 눈썹 끄트머리까지 내려온 거 같기도 하다. 조금 더 자라지 않았을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문득 거울 속 자기 꼴이 웃겨 거울을 집어던진다. 부질없다. 모두 자기 위안이다.




이 모든 불안과 혼란의 감정들을 그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는 또다시 관계의 문 앞에 서있다. 불안한 심장박동에, 그녀의 흔들리는 시선에 그는 괜찮다고 다독인다. 그는 (정말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문을 두드릴지, 손잡이를 돌리다 말고 뒤돌아 서버릴지는 그녀의 선택이다. 용기를 낼 차례다. 마주 잡은 그의 손이 따뜻하다.



@Yogurt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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