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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2)

나의 첫사랑

by 정유진

나는 대만 영화를 좋아한다. 대만 청춘물에 나오는 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한국 학교와 한국 학생들 모습과 겹쳐져서 그런 건지, 그 특유의 쨍한 색김이 좋아서 그런 건지, 대만 영화의 감성이 나의 감성과 일치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언제부터인가 대만 영화를 찾아서 보게 될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다.


계륜미와 주걸륜이 주연이었던, 2008년에 개봉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이후로 대만 영화를 꽤 여러 편 찾아 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단연 내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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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 검색하면 이렇게 나온다. 간단히 말하자면 고등학교 1학년 남자주인공 커징텅이 여자주인공 션자이를 좋아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공부에 관심 없는 커징텅과 전교 1등 션자이.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 서로 가까워지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로맨스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좀 다른 게 있다면, 이 영화에 나오는 남학생들이 모두 션자이를 좋아한다는 것! 션자이는 공부도 1등, 매력도 1등인 넘사벽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여주인공이 넘사벽이 되고 나니 영화가 더 재밌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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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올림픽 같은 국제 경기에서도 약자를 응원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에서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커징텅을 자연히 응원하게 되었다. 말썽꾸러기 커징텅을 선생님이 션자이 앞에 앉히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싹트게 된다. 두 사람 사이의 몰랑몰랑한 감정은 꽤 오래 계속된다. 각자 다른 대학교에 가게 되며 몸은 멀어지게 되지만 그들은 여전히 서로에게 마음이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커징텅은 션자이의 결혼식에 초대받게 된다. 나는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결말을 기대했건만, 영화는 다르게 흘렀다. 소설이 원작이라고 하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다. 사실 좀, 실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끝을 맺는 게 커징텅에게도, 션자이에게도 '첫사랑'이라는 기억을 온전히 갖고 살게 해 주는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의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을 회상해 봤다. 나는 사춘기랄 것도 없이 무난하게 지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절 나 역시 커징텅, 션자이처럼 누군가를 꽤 좋아했던 것 같다. '~같다'라고 표현하는 건 너무 애매모호한 표현이지만 정확히 그때의 그 감정이 어땠는지 명확하지가 않아서 '~같다'라는 표현을 쓰게 된다.


학창시절, 나는 션자이처럼 전교 1등은 아니었지만 성적도 늘 상위권이었고, 교우 관계도 꽤 좋았다. 언젠가 한 번은 '반에서 가장 믿음이 가는 친구'라는 제목으로 투표를 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1위로 뽑힌 적도 있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웃기지만 적당한 유머감각과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 가볍지 않은 모습이 친구들에게 좋게 보였던 것 같다.


이렇게만 말하면 내가 아주 사교적이고, 연애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었을 것 같지만 나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그야말로 '유교걸'이었다. 남학생과 너무 친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서서 내 감정을 꽁꽁 숨기고 지냈다. 열일곱 열여덟 무렵, 영화 속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의 나는 호감이 가는 친구가 있었지만 그 친구에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그 아이는 알게 모르게 늘 날 챙겨주고 있었다. 어느 날에는 내가 몸살인지 감기인지에 걸려 수업 시간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있던 적이 있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내 볼 밑에 그 애의 카디건이 곱게 접혀 내 볼을 푹신하게 지탱해주고 있었다. 또 어느 날인가는 내가 좋아하는 맛 우유를-아마도 초코우유였던 것 같은데-책상 위에 놓고 가기도 했고, 어느 날인가는 자기 mp3와 내 mp3를 바꿔서 들어보자고도 했다.


각기 다른 대학교에 갔지만 우리는 종종 만나 커피도 마시고, 맥주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랬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좋아한다'라고 고백을 하지는 않았다. 제3자에게 그 친구의 감정을 언뜻 듣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 상태로 지내는 게 좋았다. 지금와 돌이켜 보면, 우리가 왜 그렇게 그저 친한 친구 사이로 지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친구의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나는 그 친구와 뭐랄까, 친구와 연인 그 중간의 어디쯤에서 계속 왔다갔다 하며 지냈던 것 같다.


지금도 종종,

대만 영화 같은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청춘 영화를 보면 그 친구가 떠오른다. '그때, 내가 뭔가 다른 행동을 했다면 뭔가 다른 일이 벌어졌을까'라는 생각도 해 본다. 이제와 그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그런 기억들이 추억이 되어 삶을 지탱해주기도 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결혼식장에서 커징텅은 그녀를 축하해 주고 함께 기념 촬영을 한다. 션자이의 남편이 자기와 뽀뽀를 하면 신부와도 뽀뽀를 하게 해 주겠다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데, 커징텅이 그 말에 움직인다. 나는 이 영화를 꽤 오래 전에 봤음에도 이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커징텅의 마음이 어떨지 옆에 있지 않아도 잘 알 것만 같아서 마음이 좀 많이 짠했다.


이 영화 속 수많은 명대사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이거다.


"나도 널 좋아하던 그 시절의 내가 좋아."


어쩌면 이 말은, 내가 그 친구에게 하고 싶던 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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