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준 최고의 타임슬립 영화
“나비가 브라질에서 날갯짓을 하면 텍사스에 토네이도가 일어난다.”
혼돈 이론을 설명하는 이 유명한 말은 2004년 에릭 브레스와 J. 매키 그루버 감독의 영화 <나비효과(The Butterfly Effect)>를 대표하는 문장이다.
주인공 에반(애쉬튼 커처)은 어린 시절의 충격적 사건들로 기억의 공백을 가지고 자란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일기장을 매개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에반은 과거로 돌아가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하고,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반복해서 과거를 바꾸려 하지만, 그때마다 현재는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일그러진다. 그가 선택을 바꾸는 순간마다 삶은 전혀 다른 길로 흘러간다. 순간의 용기 있는 선택이 행복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는 이를 잃거나 자신이 파멸에 이르는 결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2004년, <나비효과>가 개봉했을 즈음하여 타임슬립 영화가 우후죽순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내가 본 타임슬립 영화 중에서 <나비효과>를 넘어설 만한 작품은 단언컨대 없었다. <나비효과>는 단순한 타임슬립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과거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완벽한 현재를 만들 수 없다"라는 잔인하지만 진실된 메시지를 전해 준다.
누구나 가끔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이라며 후회를 한다. 다른 학교를 갔더라며, 다른 직업을 선택했떠라면,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등등.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걱정이 든다.'과거를 바꾸었는데 내가 원치 않는 부분까지 바뀌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예를 들어, 나는 배우자와 잘 살고 있는데 A라는 직업 대신 B로 바꾸었더니 현재의 배우자가 바뀌어 있다면? 이런 식이다.
<나비효과>는 그런 우리의 우려와 걱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과거를 아무리 고쳐도 완벽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을 준다. 다소 교훈적인 결론이긴 하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건, 후회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지금의 선택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게 하고 싶다.
“과거의 여행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내는 여행이야말로 우리가 떠나야 할 진짜 여행이다.”
<나비효과>가 좀 더 특별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극장판과 감독판 결말이 다르다는 점에 있었다. 극장판은 마지막에 에반이 자신과 여주인공 켈리가 처음 만났던 어린시절로 돌아간다. 그 자리에서 켈리에게 "나랑 놀면 안 돼!"라는 식의 일부러 상처 주는 말을 한다. 켈리가 자신과 인연을 맺지 않도록 과거를 끊어버림으로써, 그녀가 불행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선택이었다. 현재로 돌아온 에반은 성인이 된 켈리와 스쳐지나가지만 서로 말을 걸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간다. 씁쓸하지만 그래도 밝은 엔딩으로 볼 수 있었다.
그에 비해 감독판은 훨씬 어둡고 충격적이었다. 에반은 더 이상 과거를 바꾸는 걸 멈출 수 없다고 느끼고, 아예 태어나지 않기로 선택한다. 어머니의 자궁 속, 탯줄을 스스로 목에 감는 방식으로 생을 거부한다. 그래서 현재에는 그가 존재하지 않고, 모든 불행의 연결고리도 사라지게 된다. 결말을 보고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그때의 그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나리오 공부를 해 봐서 알지만 타임슬립 영화는 시나리오가 거미줄처럼 촘촘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져버린다. 워낙 타임슬립물을 좋아해 나도 두어 편 그런 시나리오를 써 보긴 했지만 여간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게 아니다. 과거를 바꾸고 나면 그 이후의 사건들을 제대로 바꾸고, 캐릭터들이 그 바뀐 과거를 어느 정도까지 인지하고 있는지 일일이 설정해야 한다. 한 번 봤던 영화를 또 다시 보면 재미가 덜해 웬만하면 다시 보지 않는 편인데 <나비효과>는 너무나 촘촘하게 짜여진 시나리오라는 생각이 들어 지금까지 일곱 번은 본 것 같다. 아마도 조만간 열 번을 채우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