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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베티 May 03. 2022

도의 세계를 아십니까

동빙고 스타벅스 

“언니가 E형이라고?”

썬이 놀라 묻는다. 썬은 사람에게서 에너지를 얻는 타입이다. 그녀를 만나려면 최소 일주일 전 사전예약을 해야 할 정도다. 사람들은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부담 없이 그녀를 부르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응한다. 전형적인 E형 인간이다. 반면 나는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있어도 다섯 시간 정도면 방전돼버리는 타입으로 어지간해서는 여행도 함께하지 않는다.

“언니가 E형 인간이라니 신기하긴 하다. 언니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잖아. 나 같은 경우는 혼자 있는 시간으로 나를 채우는 전형적인 I형이고.”

옆에 있던 윤이 말을 받았다. 윤은 예쁜 옷을 사고, 예쁘게 공간을 꾸며놓고, 요리를 하며 집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가끔 나처럼 혼자 카페에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지만 여간해서는 일부러 나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사실 나조차도 내가 E로 시작되는 MBTI를 가졌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긴 한다. 다만 집에는 못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므로 남 얘기하듯 내가 E형이라는데? 하고 만다. 


“글쎄. 나는 밖에 나가 혼자 있는 시간으로 날 채우는 인간인가 보지 뭐.”


심리치료 선생님은 선 세 개를 수평으로 그리셨다. 오선지 같은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중간, 미에 해당하는 부분의 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 중간선, 보통 사람들은 이 선에서 기분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면 이 맨 윗선(솔 부분)으로 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은영님은 원래 시작점이 이 맨 아래(도부분)입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거나 에너지를 받는다고 해도 맨 윗선으로 가긴 힘들어요. 아주 정말 힘들게 윗선으로 간다 하더라도 금방 지치고 말지요.”


인생의 어떤 수수께끼 하나가 맥없이 풀린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남들이 미에서 시작할 때 나의 디폴트 값은 처음부터 도였고 그러니 아무리 즐거워도 나는 그저 남들의 시작점까지 가는 게 고작인 것이다. 사람들이 신나게 술 먹다가 ‘우리 2차, 3차 가자,’ ‘아니 아예 날 새 버리자!’할 때 나는 표정이 굳는다. 그들의 충만한 에너지에 질려 ‘아.. 집에 가고 싶다’ 소리를 삼켜버린다. 물론 나도 마신 술병 개수로 치기를 부리던 젊은 날도 있었다. 그때조차도 술 취한 친구들을 택시 태워 보내고 다음날 안부를 묻는 것은 나였다.


심리검사지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또 신기한 게 은영님은 에너지가 가득하네요. 호기심도 많고요. 보통 불안이 심한 분들이 바깥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은영님의 에너지는 외부를 향해 있어요. 불안이 없었더라면 이 에너지를 다 풀고 살았을 텐데. 참. 안타깝네요. ”


그러니까 결국 나라는 인간은 내 안으로 침잠하고 싶어 하는 불안과 밖으로 나가고 싶은 에너지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타입이다. 이것을 단순히 E와 I로 나눌 수 있을까. 장담하건대 훗날 MBTI 검사에는 나처럼 혼자 놀기 좋아하면서 집에는 못 있는, 고독과 안 고독에 발을 걸친 타입을 집어넣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도의 세계’에서 잔잔하게 가라앉아 종종 혼자 미의 기분에 도달하는 고독의 기술을 연마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내게는 그 고독의 기술을 연마하는 곳이 바로 카페다.


미국에 있던 S군이 한국에 왔을 때 ‘나 지금 혼자 카페에서 글 쓰다 잠깐 나와서 전화 거는 거야.’라고 말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니 궁상맞게 커피는 왜 혼자 마셔? 집에 커피믹스 없어? 그거 타 먹어. 돈 아깝게.’라고 물어봤었다. 공중전화의 동전이 뚝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랬다. 그때는 핸드폰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 시애틀의 스타벅스도 동네 구멍가게였던 시절, 한국에는 다방이라는 말 대신 커피숍이란 말을 쓰던 시기였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십 년쯤 뒤, 나는 혼자 궁상맞게 카페에 가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게 돈 아깝지 않았는지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처음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카페에 앉아있었을 것이다. 약속시간에 늦어 허겁지겁하는 것보다 30분 정도 일찍 나가 카페에 있는 걸 좋아했으니까. 가끔 그 시간이 너무 좋아 친구가 늦는다고 삐삐를 쳐도(역시 핸드폰은 아직 나오기 이전이다) 매우 관대해지곤 했다.

논문 쓸 때는 도서관 옆 스타벅스로 갔었다. 신기하게도 글 쓰는 작업에는 조용한 도서관이 좋았지만, 글을 읽거나 고치는 작업에는 스타벅스가 좋았다. 그때 나는 마키아토에 샷을 하나 추가한 더블샷 마키아토로만 마셨었는데 논문이 끝나갈 무렵 뱃살은 논문 두께만큼 불어 있었다. (얼마 전 스타벅스에는 바닐라 더블샷 마키아토라는 신메뉴가 나왔다.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이거 내가 이십 년 전에 개발한 건데 하고 말이다. 꼭 한번 도전해보시라. 쓴맛과 단맛의 절정을 맛볼 수 있으니까.)


직장 다닐 때 출근도 30-40분 먼저 해서는 근처 맥도널드나 카페를 다니며 혼자 커피를 마시다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은 직장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긴장감을 해소하는 나만의 의식이었다. 그렇게 혼자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하는 시간들이 점점 늘어나 결국은 아예 일삼아 혼자 카페를 가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카페에서라면 나는 ‘솔’의 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쉽게 ‘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그러나 우리 E와 I의 중간적 인간들은 늘 ‘도’ 아래의 세계를 경계해야 한다. < 명랑한 은둔자>의 캐롤라인 냅은 이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고독은, 내 경험상, 자칫하면 미끄러지는 경사로다. 처음에는 안락하게 느껴지지만, 종종 아무런 경고도 자각도 없이 훨씬 더 어두운 것으로 변신할 수 있는 상태다.


내가 고작 오선지라는 표현에서 헤매고 있을 때 그녀는 이렇게 근사하게 표현했다. 과연 이 바닥 장인이다. 그녀는 이 말 또한 잊지 않는다.


고독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돌볼 의욕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달래고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의 I가 자꾸 안락한 고독의 세계로 기어들어갈 때 E는 내가 널 즐겁게 해 주겠다며 머리채를 휘어잡고 속삭인다. 고독의 본질은 사실,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볼 의욕인 것이다.


내가 가장 애정 하는 나만의 고독 연마 장소로 나는 스타벅스 동빙고점을 꼽는다. 풍수지리 같은 것은 모르지만 이 스타벅스터에는 홀로 먼 산 바라보는 기운이 가득 차 있다. 희한하게 나처럼 고독의 기술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꽤 모이는 것이다. 카페 문화에 익숙한 유럽인들이 혼자 오기도 하고, 근처 호텔에 묵는 사람들이 신문을 읽다 가거나 반려견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반바지 차림으로 어슬렁거리며 노천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가볍게 마시고 가버리기도 한다. 대체로 조용하고 대부분 고독하다. 근처 이태원 스타벅스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새로운 곳으로의 모험이 귀찮을 때, 어딘가 가고 싶지만 가고 싶지 않을 때, 집중해서 무언가 읽어야 하거나 써야 할 때. 나는 도보로 20분 남짓한 동빙고 스타벅스까지 걷는다. 가벼운 산책의 종착지로 딱 좋은 위치다.


내가 도의 세계에 살듯 누군가는 계속해서 솔의 세계에서 살 것이다. 생각만 해도 진 빠지는 일이다. 그보다야 커피 한잔과 카페 좌석만 있으면 조심스럽게 ‘미’로 올라갈 수 있는 고독의 기술을 연마하는 편이 훨씬 가성비 좋게 느껴진다. 물론 기분은 가성비의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도의 세계를 아십니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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