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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베티 Sep 18. 2022

외로운 늑대 클럽

이촌동 헬카페 


오전 10시 30분, 이촌동의 헬카페 스프리터스앞에서 난,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헬카페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지저분한 박스가 쌓여 있어 진입이 불가능했다. 혹시 그 사이에 폐업을 한 것인가 당황스러워 헬카페 본점으로 전화를 걸었다. 폐업은 아니고 원래 오픈 시간이 11시 30분이라는 것이다. 우리 동네 헬카페는 오전 8시에 문을 열기 때문에 이촌동 헬카페도 그럴 것이라 착각한 게 문제였다. 한국에 사는 친구와의 약속이라면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하지만 오늘의 약속은  15시간 넘게 피렌체에서 날아온 루나님과의 8년 만의 만남이다. 다음이라는 게 언제일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멀리서 오는 분을 가이드하는 입장에서 오픈 시간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약속을 잡은 것은 덜렁대는 내 성격 탓이다. 애매한 시간에 만난 우리는 다른 카페에 들어갈까 아니면 11시 30분까지 시간을 때우다가 올 것인가! 고민하다가 그냥 이촌동을 한 바퀴 산책하기로 했다. 애당초 그녀가 이촌동에서 유년을 보냈고, 종종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선택한 약속 장소였다.


"어머, 저 왕궁 맨션 저게 아직도 있네? 저기 봐요.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네. 어머 내가 다녔던 구**치과가 아직도 있어요."


루나님은 추억 박물관이라도 보듯 유년을 더듬었다.  그녀가 이촌동에 살 때 유치원에서 겪었던 이야기며 한국 엄마들의 당시 교육열등에 대한 이야기가 흐르다 다시 건물과 거리로 옮겨가는 식으로 대화는 이촌동 구석구석을 넘나들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지금은 사라진 렉스 아파트, 새롭게 그려지는 지도를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이촌동은 개발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아 많은 추억들이 소환되어 왔다. 한 달에 몇 번씩은 오는 이촌동이지만 살아본 적 없는 내게는 그저 낯선 동네이다. 그나마 내가 이촌동에서 그녀보다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곳은 역시 헬카페뿐이었다. 정류장에 앉아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니 이미 헬카페는 오픈 시간을 넘긴 뒤였다. 


우리가 만난 것은 두 번째지만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서로의 블로그를 탐색하면서 일상을 주고받았던 터라 그 어느 친구보다도 상세히 서로의 안팎을 알고 있었다. 내가 남편을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알던 사이, 내 인생의 반절 이상을 알고 있는 그녀다. 

그러니 내가 헬카페의 헬라떼를 입이 닳도록 칭찬한다는 사실도, 커피를 끊었다가 다시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헬카페로 달려갔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그녀기에 내가 헬카페로 가자고 했을 때 그녀는 '거기가 어딘데요'라고 묻지 않았다.   



헬라떼는 나오는 즉시 그 자리에서 한 모금을 마셔야 한다. 그것은 바리스타의 철학이다. 가장 신선할 때, 가장 맛있을 때 손님에게 맛 보이고 싶다는 자존심이다. 그러니 이 커피는 테이크아웃을 할 수도 없고 이태리에서는 더더욱 맛볼 수 없는, 오직 이 자리, 이 순간에서만 허락된 커피이다. 우리 만남의 속성인 일기 일회一期一會와도 비슷하다. 

 

우리는 바리스타로부터 건네받은 헬라떼를 신성한 이슬이라도 되는 듯 한 모금씩 마셨다. 

"음. 아주 쌉쌀한 맛이네요." 그녀는 짧게 코멘트했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그 카페에 앉아 시계 한번 들여다보지 않고 밀린 이야기들을 나눴다. 우리의 이야기는 토끼처럼 방황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할 수 없었던 ( 이해받지 못했던 ) 이야기들을 주르를 쏟아내면서 고등학교 여학생들처럼 깔깔거리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하면 '어!' 하고 알아채는 대화를 할 수  사이란 것은 이렇게나 편한 것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남에게 싫은 소리는 못하지만, 듣기 좋은 소리는 더더욱 못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성격과 인간관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눈 한번 딱 감고 섞여 들면 되는데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되고 만다. 문제는 그런 나 자신이 싫지 않다느 거다. 


"저는요, 이제 좀 다르게 살아보게요. 으샤 으샤하는 모임에도 나가보고 저를 이끌어주겠다는 사람에게 싫어도 맞춰볼까 봐요. 어찌 되었든 그런 사람들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는 건 맞잖아요."

나는 쌀 한 톨 나오지 않는 고민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루나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글쎄, 억지로 닭장 안에 들어가 봤자 자신이 외로운 늑대라는 사실만 확인하고 나올 뿐이에요." 

외로운 늑대라는 적확한 표현에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이런 적확한 표현이 좋다. 


어쩌면 헬카페의 바리스타도 그거 아닌가 싶다. 외로운 늑대. 

요즘 커피는 가볍고 산뜻하다. 모던한 매장에 그루브한 음악이 나와야 잘 나가는 카페라고 세상이 외친다. 그 가운데 헬카페는 꿋꿋하게 통돌이에 콩을 직접 볶는 수고로운 로스팅을 하고, 묵직한 쓴맛 나는 커피에,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클래식을 틀고, 꿋꿋하게 생화 장식을 한다.


알 길은 없다. 우리 외로운 늑대들은 그야말로 외로운 존재들이라 그걸 티 내고 싶지도 않고 아는 체 해주길 바라지도 않으니까. 


이태리로 돌아간 그녀가 문자를 보내왔다. 


참, 그날 헬카페에서 마신 커피는 한국에서 마셔본 커피 중 제일 맛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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