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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베티 Sep 16. 2022

모든 그리움에는 거리가 있다

고성 앤트리 카페 

나는 자칭 창덕후다. 창가에 앉아 있는 것을 참 좋아한다. 하늘 하늘한 레이스가 쳐있고 녹색 나무들이 춤추는 사이로 햇살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들이 내 테이블 위의 커피와 책 사이에 비치는 오후.  생각만 해도 행복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그러나 카페를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어쩐지 그 로망에 딱 어울리는 자리를 만나게 되었을 때 가서 앉는 것보다 거리를 두고 그 자리를 지켜볼 때 훨씬 더 근사하다는 것을. 


고성 앤트리 카페에 갔을 때도 그랬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카페의 주인은 <빨간 머리 앤>을 너무나도 좋아하여 작품에 나오는 앤의 집처럼 녹색지붕을 올린 박공집을 지었다. 그것도 바닷가 시골 마을 한 복판 논밭 가운데 떡 하니 서 있어서 얼핏 작품 속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초록지붕 집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상상하게 된다. 


에이번리 마을에 처음 들어서던 순간,  "커스버트 아저씨, 제가 살게 될 녹색지붕 집이 어딘지 맞춰볼게요. 말하지 마세요!!"라고 마차에서 벌떡 일어나던 앤처럼 나도 네이버 지도를 끄고 시선을 초록지붕 집에 고정시키고 쭉 걸어가 본다. 마음이 펄떡대기 시작한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그 초록색 지붕 집은 카페가 아니란다. 초록 지붕 집 바로 옆, 교회를 본 딴듯한 하얀 건물이 카페라는 것이다. 사람 마음 다 똑같은지 백이면 백 그 초록지붕 집 앞에 가서 손잡이를 돌려보고 두들겨본다고 한다. 초록지붕 집은 실제로 주인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라는 설명이다. 

이쯤에서 아마도 방문객은 조금 실망할 것이다. 기왕이면 녹색 지붕 집에 들어가 보고, 지붕 안 다락방에 올라가 앤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느껴볼 수 있게 책상도 놓고 침대도 놓았더라면 좀 좋아? 싶은 마음이 든다. 


하는 수 없이 카페 안으로 들어가 본다. 카페 안은 그런 방문객의 마음을 달래듯 소녀소녀한 일상을 구현한 앤틱 의자와 테이블, 레이스 테이블 보등으로 꾸며져 있다. 명색이 휴양지 카페 건만 바다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어서인지 일부러 이 시골 논밭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드문 모양으로 손님도 나 하나뿐이다. 덕분에 공간도 시간도 정지한 듯싶었다. 


창가의 예쁜 자리를 발견했다. 딱 그런 엽서 속에 나오는 것 같은 창가 자리다. 또다시 펄떡이는 마음을 끌어안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이내 일어선다. 어쩐지 그 자리에 앉기보다 조금 떨어져서 보는 편이 훨씬 예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페 안에는 아주 오래전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저장되어 있던 그런 곡들이 흐르고 있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처럼 내 몸 안에 자연스럽게 가사와 음률이 각인된 그런 노래들이다.  일렁이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앤의 집에 초대받았다면 커피보다야 티를 마셔줘야 할 것 같은 기분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아이스티를 주문해본다. 음료를 받고 자리로 옮겨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그제야 창밖 앤의 집이 눈에 들어온다. 


아...



어쩌면 순전히 내 멋대로의 해석일지 모르지만 이 카페를 만든 분도 앤의 집을 직접 들어오는 것보다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워낙 히트를 친 바람에 우리에게는 <빨간 머리 앤>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제는 <Anne of green gables>, '초록박공집의 앤'이라는 뜻이다. 이후에도 작가 몽고메리는 '어디 어디'의 앤 이라는 식의 제목으로 10권까지 앤의 일생을 집필하게 된다. 앤의 대학시절을 다룬 3권 <레드먼드의 앤>에서는 앤의 영혼의 단짝 다이애나가 평범한 동네 청년 프레드 라이트와 결혼을 하게 된다. 들러리가 된  앤이 다이애나의 방에서 결혼식 드레스를 봐주다가 무심코 자신의 집 창을 건너다본다. 어린 시절 램프를 들어 서로 수신호를 교환하던 그 창문이다. 이제 이 방에서 자신의 방을 향해 램프를 흔들어 줄 다이애나 배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앤은 서글퍼한다. 그렇게 그녀는 다이애나의 방 창문에서 램프를 기다리던 어린아이 시절과 작별을 고한다.  


카페의 이 테이블 자리에 앉아있자니 앤이 보았을 그날의 창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다. 내가 앤이 된 것도 아닌데 괜스레 그립고 또 그리운 기억들이 오버랩된다. 모든 그리움에는 거리가 있다. 아니 모든 좋은 것에는 거리를 두는 것이 옳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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