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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베티 Sep 20. 2022

지난여름, 나는

홍대 작업실 01

중학교 때였다. 수업시간에 돌아가면서 앞에 나와 자기 꿈을 이야기해보라고 했을 때 나는  ”저는 커서 소설가가 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등장인물들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해버리고 다른 애들의 반응 같은 건 살피지도 않고 쓱 내 자리로 들어와 앉았다. 아마도 인기 있던 국어 교생의 주목을 끌고 싶었던 것이리라. 일단 그건 대성공이었다. 쉬는 시간에 교생 선생님이 내 책상으로 다가와 무릎을 구부리고 눈높이를 맞춘 뒤 어떤 소설을 쓰고 싶냐고 물어보는데 다른 아이들의 질투 어린 시선이 느껴진 나는 그만 대답 한 마디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사실 그건 내 꿈이 아니었다. 소설가처럼 대단한 '것'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믿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아주 어린 시절부터 쭉 무언가 계속 써왔다. 중학교 때는 로맨스 소설에 팬픽, 고등학교 때는 형이상학적 소설, 일기, 편지, 커서는 블로그... 하여간 무언가 계속 써오기는 했다. 갑작스럽게 영감을 받아 미친 듯이 휘갈겨쓰면서 날밤을 세우고 끝도 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그 소설들은 착상하지 못한 수정란들처럼 여기저기 사라져 갔다. 하지만 즐거웠다. 내가 무엇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오롯이 내가 즐거워서 그뿐인 것. 그것에 푹 빠져 늘 상상하고 지어내는 일들만 생각했다. 그 무렵의 나는 어딘가 좀 나사가 빠져서 늘 먼 곳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것 같다.


지난여름 나는 그때의 나 같았다. 참 열심히였다. 쓰고 있는 이야기는 <녹우 미술관>이라는 100년 넘은 고미술관에서 일어나는 기담이다. 겁 많은 나는 본격적으로 무서운 이야기는 쓰지 못했지만,  많이 순화해서 재미있고 자극적이게 쓰고자 하였다. (만약 그런 이야기가 가능하다면) 출간 제안서를 낼 때 집에서 만든 떡볶이 같은 불량식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써서 냈을 정도다.  이치코 이마의 <백귀야행>처럼 귀신 한 번 등장하지 않지만 은근하게 고아진 진한 국물 같은 기담과 정보라의 <저주 토끼> 같은 기괴한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고 나름의 '작가의 말'같은 것도 생각해두었다.


탈고할 즈음, 일부러 홍대의 '작업실 01'이라는 곳을 찾았다. 이름부터 '작업실'일정도로 이곳은 죽치고 앉아서 무언가 작업하겠다는 사람을 열렬히 환영하는 곳이다.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하게 갖고 싶은 '작업실'. 나는 나의 버켓 리스트에 나무가 보이고, 햇살 잘 드는 창이 있는 '작업실'을 제일 먼저 써넣을 정도다.

문제는 작업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야 여전히 무언가 쓰고 있고 간헐적으로 수익을 올리지만 그것이 작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정체성인지 늘 의문이 따라다닌다. 중학교 시절이야 내가 무엇을 쓰다 망치건 말건 아무도 추궁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무엇을 썼다면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함부로 뱉을 수도 없는 나이. 그러니 '작업실을 갖고 싶습니다'는 '소설가가 되고 싶습니다'와  동어이음어일지는 모른다. 글쎄 그러려면 일단 소설이건 뭐건 쓰시오. 쓴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책이라는 결과물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 작업실을 가지려면 그 정도의 명분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앨리스 먼로는 일단 <작업실>부터 가졌다. 이 작업실이라는 소설이 꽤 재미있는 게 전업주부인 주인공이 남편에게 작업실을 얻어야겠다고 하자 남편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아닌 것을 사달라고 하는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글을 쓰는 데는, 누구나 알다시피 타자기나 여의치 않을 경우 연필 한 자루와 종이 몇 장과 책상과 의자가 있으면 그만이다. 이것들은 내 침실 한 귀퉁이에 죄다 있다. 그런데도 지금 나는 언감생심 작업실까지 욕심내고 있다.... 정작 내가 좋아한 것은 '작업실'이라는 말이 풍기는 위엄 있고 안온한 분위기였으니까. 그리고 뜻을 굳게 세우고 대단한 일을 한다는 그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말을 남편에게 하고 싶지 않아서 거창하게 떠벌리기 시작했다. <앨리슨 먼로 '작업실'중에서>



도서관이나 골방은 안 되는 것인가? 가족들이 떠난 집은 안 되는 것인가? 애거서 크리스티는 평생 남들이 소설을 쓴다는 것조차 모르게 그 많은 작품을 썼다는데 핑계 아닌가? 모르겠다. 하여튼 작업실은 갖고 싶다.


그러니 홍대의 '작업실 01'은 비록 진짜 작업실은 아니지만 이름부터 내 로망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13시에 문을 연다는 것이 조금 걸렸지만 나는 구태여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한 시간 걸려 작업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블라인드가 쳐진 창가에 내 작업물들을 펼쳐놓았다. 좁은 골목에 1.5층 정도 되는 곳으로 창이 난 홍대의 '작업실01' 은 창문으로 내려다보면 지나가는 사람과 눈이 마주칠 정도로 낮았다. 창가의 뷰도 내가 그리던 나무가 푸릇한 녹색의 그런 것이 전혀 아니었다. 햇살은 너무 들어와 블라인드를 내려야 했으며 커피맛도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래도 좋았다. 백색의 소음은 너무 시끄럽지도 크지도 않게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고 있었고 바로 내 옆에도 나처럼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무언가에 열중한 누군가가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작업실 01'에서 저마다의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름 동안 A4 57장 총 8개의 에피소드를 완성했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 녹우 미술관>을 세 군데 메이저급 출판사에 보냈다.

호기롭게 원고를 투고하고 나자 후폭풍이 몰려왔다.


이거 진짜로 출간되면 어떡하지?


너무 재미있게 썼고, 출간되면 좋긴 하겠는데, 어디 가서 내가 썼다고 말하기도 너무 민망한 기담집이다. 소설을 내면 필명으로 내야 하나? 이 이야기로 편집회의를 하게 되면 민망할 거 같은데...


아니 그렇다고 안 되면 어떡하지?


더 쓰고 싶고 쓸 얘기가 많은데.  여기서 멈추면 허무한데. 내 여름은 뭐가 되는 거야.


같은 하나마나한 뫼비우스의 띠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쓸 때는 그런 고민을 하나도 못 했던 걸까? 오롯이 나를 위해서 쓴 게 과연 글 쓰는 자의 온당한 태도인지도 의문이다.       


원고를 보내고 며칠 뒤, C출판사에서 꼼꼼히 검토 뒤 연락해주겠다는 메일을 보내주었다. 썸 타는 남자의 문자처럼 모호하고 예의 바른 메일이었다. '그래도 뭔가 있으니까 검토해주겠다는 거겠지?'라는 생각과 '그냥 예의상 보낸 걸 거야'라고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문구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다.

 

글 쓰는 동안 즐거웠고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을 느꼈었는데 그렇다고 그 즐거움이 출판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진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이 행복했던 여름, 작업실에서의 하루를 글로 남기는 이유는, 어쩌면 세상에 탄생하지 못할, 아무것으로도 의미를 부여받지 못할 나의 <녹우 미술관>의 자취를 이렇게라도 세상에 조금 빛 보이게 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제가 서울대는 못 가봤지만 서울대에 원서는 넣어본 사람입니다 같은 증거라도 남기고픈 심보 인지도 모른다.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C출판사에서 드디어 메일이 왔다. 자신들의 출판사에서는 출판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썸남의 문자와 출판사의 메일은 행간을 읽으면 안 된다. 이렇게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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