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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베티 Oct 13. 2022

우리 삶의 평화로운 한 조각

피스 피스 파주 출판단지점 

네가 방학 동안에 파주의 보리책밭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반가운 한편 망설여졌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광역버스를 타고 가는 1시간 넘는 길이 10살 네게 버거울 거라는 건 두 번째 문제였어. 사실 나는 네가 3시에 끝나는 수요일에 종종 파주를 마실 다니듯 다녀오곤 했단다. 왕복 2시간이 걸리는 먼길이지만 나는 자유로를 달리는 그 길마저도 파주 순례의 일부인 것처럼 사랑했어. (그래서 이름마저도 자유로인가봐!)


내가 파주를 왜 그리 좋아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파주를 뒤덮은 새파란 하늘과 그 사이사이 놓인 근사한 북카페들,  그리고 어김없이 넓은 창들, 그 사이로 보이는 우거 진수 풀들, 빼곡한 책들과 커피까지. 내가 좋아하는 그 모든 것들이 거기엔 있거든. 언제 가도 백퍼센트의 행복이 약속된 장소가 있다는 건 참 대단한 일 아니니? 그런 곳이니까 사랑하는 너와 나눌 수 있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는데 이상하게 망설여지더란 말이야. 


사람은 누구나, 아니 어쩌면 모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엄마는... 일정량의 혼자 있는 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오랫동안 수면 위로 나와있던 물고기처럼 힘들어지는 법이거든. 그런데 파주는 그런 일정량의 시간을 넉넉히 채울 수 있는,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 중의 하나였어. 요요처럼 결국은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만 그 끈이 가장 멀리 닿는 곳 말이야. 그래서 나는 혼자만 가고 싶었던 거야. 

오해는 하지 말아 줘. 그건 널 사랑하고 안하고의 문제와는 다른 거니까. 어쩌면 나는 약간 겁먹었던 것 같아. 나 혼자 파주에 갔을 때 그 가슴 밑바닥부터 솟아오르는 평온함과 자유로움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나는 너의 보호자가 되어 파주를 가는 거고, 그러면 온전히 나로서 파주를 즐기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될 테고, 내가 사랑하는 공간이 그렇게 퇴장하는 것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어.  


하지만 그건 기우였지. 


우리의 시작은 썩 괜찮았지 않니? 2200 광역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 앞에서 우리는 그 구하기 힘들다는 포켓몬 파이리 빵을 손에 얻어서 온 행운을 다 잡은 아이처럼 기뻐했어. 2층 버스는 못 탔지만 그 정도의 행운을 양보할 마음은 충분해 보였어. 


우리는 제일 먼저 네가 가고 싶다던 보리책밭에 들려서 한 시간 넘게 지치도록 마음껏 책을 보았지.  그리고 아울렛에 가서 파스타도 먹었어. 너의 기억에 행복의 시럽을 뿌리기 위해 평소엔 사주지 않던 아이스크림도 사주었어. 소다맛이었지.  어찌 되었건 너를 파주로 초대한 이상 나처럼 행복한 기억을 안고 돌아가기를 바랐으니까. 


그런데 사실 네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의외로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른 피스 피스라는 카페였어. piece는 파이의 조각을, 또 다른 peace는 평화를 뜻하는 이곳은 이름처럼 파이 맛집이었지. 파스타와 아이스크림까지 잔뜩 먹은 우리는 파이를 먹을 자리까진 남지 않아  플랫화이트와 핫초코만 주문하기로 했어. 

너른 잔디가 내다보이는 직사각형 창가 옆에 자리를 잡았지. 예쁜 어린이용 플라스틱 텀블러에 담긴 핫초코를 보면서 너는 잔이 예쁘다면서 좋아했어. 너는 나의 맞은편에 앉아 보리책밭에서 사 온 책을 읽으면서 음료를 홀짝였고 나는 구상하고 있는 소설을 꺼내 적고 있었지. 그렇게 30여분쯤 서로의 시간을 갖고 나서 우리는 짧게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어. 놀랍도록 차분하고 자연스러운 시간이었어.  평화로웠어. 믿기지 않을 만큼. 

"써니야, 너무 좋지? 우리 언제까지 이런 카페 놀이를 할 수 있을까?"라고 탄식처럼 내뱉었더니 꼬마 철학자인 너는 시크하게 한마디 했지. 


"엄마, 그럼 이 순간을 소중히 여겨." 

그리고 넌 자기가 내뱉은 말의 무게도 모른 채 읽던 책으로 눈을 돌렸어. 그때 문득 카페 입구에 쓰여있던 문구가 눈에 들어왔어. 


you are the apple to my pie.   

그건 꼭 우리의 관계 같다고 생각했어. 

사과가 없어도 파이는 완성되겠지만 딱 내가 좋아하는 그 사과파이는 만들지 못할 거야. 


아주 오래 전의 일도 아닌데 나는 벌써 그 시간이 그리워져. 그날, 내가 아니 우리가 느꼈던 삶의 한 조각은 햇빛에 부드럽게 구워진 파이처럼 달콤했으니까. 


너를 내 삶에 초대했고 우리는 여태까지 그런 조각들을 모으고 있어. 어떤 조각들은 완벽한 모양은 아닐 테고 조각과 조각 사이에는 엉성한 틈이 보이기도 하지만 이 날의 피스피스처럼 완벽하고 예쁘게 빚어진 조각들은 기억이 바닥나는 날까지 반짝이며 남아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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