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발 아시아나 에어라인
나는 커피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그중 아끼는 사진 하나는 기내서빙용 사각형 잔에 담긴 커피사진이다. 아마도 연애시절,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찍은 것이었을꺼다. 창가옆이라 햇살은 은은하게 비껴들고 그 햇살안에 커피가 채 식기전, 날아가는 온기까지 포착해서 내 마음에 쏙 든다.
비행기안은 여러모로 카페를 닮았다. 한정된 시간동안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어떻게든 빈둥거리며 시간을 잘 보는 사람이 승자인 장소다. 그런거라면 나는 24시간이라도 할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남편과 나는 유럽여행을 일등석을 타고가자는 야무진 꿈을 이루기위해 포인트를 마일리지로 적립할 수 있는 신용카드를 발급 받아 차곡 차곡 쌓던 중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지난 일이다.
몇년 전 그 것...
그러니까 공황이란 놈이 찾아오기 전에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황이 오면 비행기를 못 탄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내가 당하기 전엔 그랬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사실이다. 웃긴 건, 나는 비행기에서 공항이 온 것도 아닌데 비행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병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과격한 불안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게 꼭 발작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찐득한 불안함은 계속 잔존하며 핀 뽑힌 수류탄처럼 괴롭힌다. 그 예상치 못한 순간이란 중대한 프리젠테이션을 앞 둔 순간일 수도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하철을 타고 가던 순간일 수도 있으며, 잠을 자던 순간일 수도 있고 심지어 행복한 순간일 수도 있다. 그렇다. 이 병이 지랄같은 건 가장 좋은 순간조차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로 뒤 코로나가 터져 열심히 모은 마일리지를 쓸 수 없었다. 유럽 커녕 제주도도 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제주도 말고도 여행갈 곳은 많았으며, 비행기를 못 탄다고 큰일나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니 피하면 그만이이었다. 그러나 내마음은 불편했다. 못 가는거랑, 안 가는것은 다르니까.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못했지만 내 마음은 항상 비행기에 대한 막연한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상하이발 대한항공안에서 찍은 커피 사진을 볼때면 내가 빼앗긴것들이 떠올랐다. 인생에 불행한 이벤트를 맞닥드린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나 역시 시간을 되돌려 그 사진 속, 공황을 모르던 기억을 되돌려받고 싶었다.
내가 비행기를 또 탈 수 있을까? 비행기 안에서 또 커피를 마실 수 있을까?
정신과의사들이 공황환자들에게 금기시하는 음식이 두가지가 있으니 커피와 술이다. 멀쩡한 사람도 공황상태로 밀어넣는 술은 그렇다치자. 그나마 일부 의사들은 커피를 허용하는 편이지만 카페인의 부작용인 심장두근거림은 공황의 증세와 비슷하기때문에 아예 끊기를 권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여튼 이노무 병은 아까도 말했듯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는걸 몹시 싫어한다. 내가 보란듯 카페를 꾸역 꾸역 가는 것도 내 영토를 더이상 빼앗기기 싫은 심리때문일지도 모른다. 뭐 가끔 식은땀이 날때도 있고 어지러울때도 있지만 버틸 수 있다. 문이 달린 곳이라면 언제고 나오면 되니까.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라면 어떻게 할껀데?
그것을 확인할 시간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 마침 코로나가 거의 완화되는 분위기고, 마침 제주도에 사는 지인이 자기가 제주를 떠나기전에 꼭 찾아오라고 당부했다. 마침 연휴였고 또 마침 날씨가는 더할나위 없이 좋았으며 또 마침 제주도 관련 맛집 취재 요청까지 들어왔으니 이제는 오히려 안 갈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망할 공황밖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공황이 무섭다는건 알지만 공황이 온다고 죽지 않는다는것까지 알고 있다. 물론 식은땀이 나고 과호흡이 오고 언제까지고 계속될것 같은 0.1초는 생과사의 틈바구니에 낀것처럼 드러운 기분이지만 그마저도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다. 내가 상하이발 커피사진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공황은 아주 막연하면서도 강렬하게 기억에만 존재하고 있다. 비상약을 챙겨볼까? 그러기 싫었다. 무엇보다 내게는 비상약이 없다. 공황인지치료는 막연한 불안이 거짓이라는 것을 뇌에 가르쳐주는 과정이다. 비상약같은걸 챙기면 내 뇌는 완벽하게 나를 믿지 못할 것이다.
일부러 새벽행 비행기를 골랐다. 비몽사몽간에 서둘러 비행기를 타야 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할 것같아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비행기는 출발! 다행히 난 항공사오너의 딸도 아니니 회항할 수도 없고 이변이 없는 한 이대로 쭉 제주도로 가는 수 밖에 없다.
어라.
내가 걱정했던 3년간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비행시간은 평온했다. 물론 망할 불안증은 계속해서 너 정말 괜찮냐고?집요한 모기처럼 잊을만하면 한번씩 들러붙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이상할정도로 괜찮았다. 불안증이 한번씩 속삭일때면 창덕후인 나는 비행기 창문에 바싹 들러붙어서 솜사탕처럼 부서지는 구름을 보거나 같은 눈높이로 나를 따라오는 태양의 광채속에 몸을 묻었다. 날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설레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미션이 완벽하게 완성된건 아니었다.
커피, 커피가 없잖아!
아무도 몰랐지만 이번 여행의 목표는 비행기 안에서 커피 사진찍기였다. 코로나로 인해 아직 기내커피는 서빙되지 않았기에 내 게획은 틀어지는 듯 했다. 비행기 창가자리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겠지 싶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디테일의 왕 봉준호감독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 서류더미에도 반드시 글씨가 쓰여있도록 소품팀에게 주문한다고 한다. 내 사진에도 그런 진정성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주도를 출발할때 직접 내린 커피 약간을 보온병에 갖고 탔다. 비장하게 두 모금의 커피를 식도로 흘려넣고 마스크를 닫았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봐라, 내가 마신 제일 비싼 카페의 커피다.
상하이발 대한항공 커피처럼 폼나진 않지만 근사한 기내 커피샷이다. 그건 공황이란 놈을 향해 들어보이는 가운데손가락이며 내 스스로에게 바치는 건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