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잠수함의 북리뷰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은이) 창비2014-05-19
얼마 전, 한강의 신작 “작별하지 않는다”가 프랑스에서 메디치 상을 수상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한강의 작품은 읽어본 적 없는데, 그의 작품들이 외국에서 수상한다고 하니 어떤 작품인지 궁금했다.
검색해보니 제주43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예전에 출간한 “소년이 온다”가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있단다.
사는 김에 두 권을 다 샀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배송이 약간 늦어져서 소년이 온다를 먼저 받았고 읽기 시작했다.
지금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있으니 한강의 작품 성향을 잘 모른다. 그런데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작가는 독자에 대한 배려보다는 작품에 몰입하는 성향이 있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에 읽었던 주제 사라마구의 책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물론 주제 사라마구의 책은 번역본을 읽었으니 번역자의 의도도 반영이 되었겠지만, 그의 책에서 사람의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지문과 대사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특징이 있었는데,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두 권 역시 비슷한 느낌이다.
소년이 온다를 다 읽었는데 주인공 이름이 뭔지 모르겠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언급된 부분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책은 광주 상무관에서 계엄군에 의해 희생당한 희생자들의 주검을 지키는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마치 독자에게 이야기하듯 누군가의 독백같은 느낌으로 이야기를 한다.
광주 비극의 현장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모습이 교차되며 무수히 많은 죽음과 그로 인한 길고도 고통스러운 후유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려는데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유튜브 영상도 찾아보고 관련 기사도 찾아보았다.
한강 작가의 인터뷰 영상을 봤는데, 소설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소년, 그가 그 광주 비극의 현장에서 지금 책을 읽는 현실의 우리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지은 제목이 “소년이 온다”라고 한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의 한강 작가 인터뷰를 보며 말하는 것과 글이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보이스카웃으로 활동하던 나는 전국보이스카웃 캠핑 대회에 참여했었다.
경기도 어딘가에서 진행된 행사에 전국의 보이스카웃이 다 모인 2박 3일의 일정이었는데, 나와 같은 텐트를 사용하게 된 친구 하나가 광주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광주에서는 그 친구 딱 한 명만 참석했었다.
아버지가 경찰로 근무하는데, 아무래도 지금 광주가 심상치 않으니 너는 일단 행사에 참석했다가 끝나면 친척네 집으로 가 있으라고 했다며 자신이 보거나 들은 광주에 관한 이야기를 밤새 해주었었다.
두 번째 기억은 군 생활에 관한 내용이다.
삼각지의 지금 전쟁기념관 자리가 육군본부였던 시절, 그곳에서 군 생활을 하다가 병장으로 진급하며 지금의 대전으로 부대가 이전했다.
경비부대에서 근무했던 나는 후발대로 편성되어 가장 나중에 대전으로 가게 되었고, 텅빈 부대를 지키고 있었다. 심심하기도 했고, 딱히 바쁜 일이 없던 중에 행정부대 건물이었던 곳을 이리저리 뒤져보고 있었다. 이사하며 남겨둔 물건 중에 쓸만한 걸 찾다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광주와 관련된 내용을 담은 책이었다. 함께 있던 동료 몰래 바지춤에 숨겼다가 나중에 화장실에서 펼쳐본 책은 투입된 병력에 관한 내용과 함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책을 훑어보다가 든 생각은 “이 책을 봤다는 게 발각되면 큰 일 나겠다”였다.
화장실 천장 위에 숨겨두었다가 이후 대전으로 내려가며 가져가지 못하고 말았던 게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광주 현장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이 두 기억은 지금까지도 꽤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였는지 모르지만 “소년이 온다”를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내 딸에게 광주의 비극은 역사의 한 단면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하나일 뿐이다. 나에게 광주민주화운동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은 이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이 일어난 시발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최근 5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사회적인 쟁점이 되고 있다.
50대 중반을 넘긴 내가 살면서 보고 듣고 겪은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은 역사가 되어 있고, 아직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육영수 여사 시해 사건, 1026 박정희 서거, 1212사태, 광주민주화운동, 전, 노씨의 구속과 석방,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의 붕괴, IMF, 세월호…. 최근에는 이태원 참사까지.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하고 힘들었던 건 아마도 이렇게 제대로 매듭지어지지 않고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비극이 있고 어쩌면 지금도 그런 비극이 추가될지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많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 고개 숙인 남자에게 곤봉을 치켜든 무장 군인, 태극기를 펼쳐들고 뛰쳐나가는 남자, 태극기로 덮은 시체들, 교련복을 입은 시체들, 오열하는 가족들, 상복을 입은 어린 아이들...
여전히 아파할 희생자 가족들의 비극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며 그런 의미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책 말미에 인터뷰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아마 이 부분은 작가가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또 다른 비극의 역사를 담고 있다.
어떤 주제는 작가가 선택하기도, 작품을 쓰기도, 발표하기도 쉽지 않을 수 있다. 아마 이 책, “소년이 온다”가 그런 주제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강 작가의 집필의 시간에 찬사를 보낸다.
133P
지금은 어리석게 들리겠지만, 그 말을 절반은 믿었습니다. 죽을 수 있지만, 어쩌면 살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겠지만, 어쩌면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뿐 아니라 조원들 대부분이, 특히 어린 친구들은 더 강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지도부를 이끌었던 대변인이 전날 외신기자들을 만나 했다는 말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패배할 거라고 그는 말했다지요. 반드시 죽을 것이며,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지요. 고백하건대 나에게 그런 초연한 확인은 없었습니다.
김진수의 생각에 대해선 알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으리라고 예상하면서도 도청 밖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왔던 걸까요. 아니면 나처럼, 죽을 수도 있지만 살 수도 있다는 생각, 어쩌면 도청을 지킬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평생 동안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란 막연한 낙관에 몸을 실었던 걸까요.
173P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