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주 May 20. 2021

마지막 기차는 몇 시에 떠났을까

-시간이 머무는 곳

시간여행 다녀온 얘기 하나 들어보시겠어요.


논산-천안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경부고속도로를 탄 지 얼마나 지났을까요. 어느새 내 앞은 점멸하는 자동차 브레이크등으로 가득 찹니다. 악명 높은 경기도 판교 일대를 지나고 있다는 실감이 났습니다. 방금 서천 판교에서 올라오는 중인데 말이지요.


비가 내리는데 굳이 다녀왔어요.

충동적으로 떠나는 여행은 나의 힘입니다. 판에 박힌 일상을 뒤집는.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이면 판교 현암리에 닿습니다. 옛 지명은 비인군 동면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판교면으로 바뀌었습니다. 동면 우시장이 충남의 3대 우시장 중 하나였을 만큼 번성했던 지역이라고 합니다.

장미여관으로 알려진 오래된 적산가옥(판교마을)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후 4번 국도를 따라 꽤 안으로 들어왔어요. 이윽고 장항선 판교역을 지나 삼거리에서 마을로 들어서려는데 집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현재도 사용 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구대 옆 '선진소방구현'의 여섯 자가 박힌 낡은 건물이, 마을로 우회전해 들어가는 순간 왼쪽 차창을 통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리 위에 우선 차를 세웠습니다. 읍이 아닌데도 마을 규모가 제법 되는 것 같아요. 검은바위(현암)로 만든 현암2리 표지석을 두고 큰 다리가 놓였고, 삼천리자전거포와 한의원(다시 보니 한약방이네요)이 양쪽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한약방은 신축 건물이었으나 자전거포는 가로로 긴 단층 건물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봄직한 집이랄까요. 한약방, 이용원, 시계점, 상회, 양품, 다방... 간판으로 훑어본 가게들이 대충 이랬습니다. 서서히 과거로 진입하는 느낌입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철공소의 전경을 찍으려고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거기 진짜 '물건'이 있습니다. 어릴 적 진주시 본성동에 있던 시공관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이었어요.

역시나.

돌아오지 않은 해병, 저하늘에도 슬픔이, 꼬마 신랑, 미워도 다시 한번, 별들의 고향....

고색창연한 포스터 속 배우들 신영균, 문희, 김정훈, 안인숙, 최은희를 다 알아볼 수 있는 나,  그렇죠. 60년생 인증입니다.

성인이 500원에  볼 수 있었다니 전화요금 10원이던 시절 이야긴가 싶습니다. 젊은 방문객들의 추억만들기를 돕는 스탬프 함이 극장 앞에 설치돼 있네요. 둘레길 좀 걸어본 사람이면 다 아는, 왜 그 방문인증 도장 찍는 거 말입니다. 다음은 옛날 우시장으로 가라고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아침 신문에서 보고 반했던 촌닭집입니다. 오른쪽 옆으로 살짝 보이는 파란 지붕이 현암갤러리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누더기 같은 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래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나는 지붕을 덮을 듯 솟은 뒤쪽 대나무 숲에 눈길이 갔습니다.

최근 전시가 끝나 갤러리를 정리하고 있던 서천군청 관광축제과의 김석환 매니저께서 비를 맞으면서까지 친절한 설명과 함께 내어준 마을지도를 보니 과거를 고스란히 담은 판교극장, 동일정미소, 동일주조장, 장미사진관, 촌닭집, 우시장, 일광상회에 특별히 보랏빛 간판을 달아주었네요.

시간이 멈춘 마을,  현암갤러리

갤러리 뒤로 돌아 들어가니 마을을 상징하는 현암-검은바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옛날옛적 커다란 검은 바위에 버티고 서서 아래쪽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잡았다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습니다.  

이 대나무와 검은 바위야말로 마을의 축 아닐는지요. 그러니 촌닭집이 그냥 치킨집이 아닌 것이지요. 이 집을 어떻게 살려내느냐가 '시간이멈춘마을'문화재생사업의 핵심이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소문난의원은 있으나 (소문난)약국이 없군요. ^^ 의사가 직접 투약도 하는 분업예외지역이겠는데, 1층 입구에는 세로로 길게 박았던 <보건약국> 간판 글씨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한달 월세는 얼마나 받으려나, 급수나 배수는 잘 될까, 오래된 한약방이 있으니 아무래도 텃세가 심하겠지 하는 쓸데없고도 행복한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시간이 멈춘 마을에 제격인 상상을요. 휴대폰 카메라로 건물 끝이 잘리지 않게 온전히 다 담으려 해도 더는 뒤로 물러날 공간이 없을 만큼 좁은 메인로드를 걸으면서, 행복하고도 쓸데없는 상상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쓸데없음으로 남아있는것. 이런. 문학의 존재이유와 일치하는군요.

약사로서 시골로 내려가 약국하는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그냥 내 생각에, 필요한 최소한의 약만 외상으로 좀 들여놓고, 팔리면 그때그때 제약사 결제해주면 되지, 그렇게 순진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때 묻은 유리창을 단 미닫이 문을 열면 먼지가 쌓여가는 약들이 장난감처럼 놓였고, 나는 낡은 책상에 앉아 있습니다. 환자가 오면 그저 세상 돌아가는 얘기 주거니받거니, 마음 아픈 얘기 들어주면서 글 쓰며 먹고사는 그런 소박한 꿈.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처럼 아득하게 여겨지는 그런 날들...


지나가던 이삿짐 트럭의 경적 소리에 퍼뜩 현실로 돌아옵니다. 여기로 이사 오는 사람도 있구나... 엉뚱한 데로 생각이 또 튑니다.

탐욕스런 자본이 혓바닥을 내밀어 세븐일레븐과 카페와 프렌차이즈 빵집이 들어서면 어쩌나 싶은 건 비단 나그네인 나만의 우려는 아닐 것입니다. 한참 뒤늦게 시작한 문화재생사업이지만 다른 지자체에서 무수히, 그리고 판박이처럼 겪었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으니 조금은 낫지 않을까 한다는 뻔한 격려를 건네고, 두어시간 머물다 떠나왔습니다. 쇠락해 인구가 2천 명 정도 밖에 안 된다는데 지역민들이 취할 수 있는 이점은 뭘까요. 특산물이나 특색있는 먹거리는 딱히 없어보이던데 추진 동력이 시들지 않을까, 하는 이 오지라퍼...  

인구 2천인 마을에 중학교가 있다는 건 뜻밖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양조장과 정미소를 한다면 십중팔구 그 지역 유지일 겁니다.

역시, 중학교 앞 동일주조장과 동일정미소를 소유한 집안이 판교중학교 설립자라고 하는군요. 사유지이므로 출입금지, 팻말을 세워 놓은 건 이 마을에서 동일정미소가 유일했습니다. 동일주조장에서 밀 막걸리를 만들다가  쌀로 막걸리를 합법적으로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옆에 정미소를 세웠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일주조장 전화번호는 45번입니다

오른쪽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이 동일정미소. 출입금지 팻말이 서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파노라마 기능을 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우측으로 꺾어 올라가면 판교중학교가 있습니다.


내가 특히 눈여겨 본 집은 보건지소 뒤 판교시장 옆에 있는 빨간 지붕의 헌 창고 두 채였습니다. 제주도의 감귤저장창고나 강화도 조양방직을 떠올리게 했어요. 도시 젊은이들이 와서 작품을 만드는 공간으로 썼다는데 지금은 한산으로 옮겨가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들의 흔적만 녹슨 철문에 남아 있었어요.

일부러 지칭개를 넣어 찍었다


다음으로는 가장 오래된 집인 장미여관입니다. 전형적인 적산가옥이라 사진만으로도 알아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장미사진관이 되기도 했었네요. 마광수의 작품 <가자 장미여관으로>가 떠오르는 건 매우 진부한 상상인가요.^^

큰도시 군산에서는 적산가옥을 꽤 여러 채 본 것 같은데 한적한 이곳에서 만나니 새롭고,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사라지면 그리울 것들입니다. 시간이 묻어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선명한 파란색과 낡은 나무의 고색이 퍽 잘 어울려 색감 자체로도 아름답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생활의 불편함은 이런 미적 형상과는 다른 심각한 문제겠지요.


마지막으로 舊판교역을 둘러보았습니다. 역사를 판교음식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코로나시대에 특히 더 을씨년스럽습니다.

1932년에 심었다는 역 앞 소나무를 돌아서 나오다 보니 거꾸로 세워둔 안내판이 있네요. 거꾸로 가는 시간, 뒤집어보는 세상, 그 전복적 상상요. 설마 그렇게 깊은 뜻으로 이렇게 눕혀두었을까요. 그렇지만 비바람에 뽑힌 것이더라도 이렇게 그냥 두는 것 또한 나는 좋았습니다.


아래 사진이 미니어처처럼 생긴 구(舊)판교역사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며 철길을 찾으려 해보았지만 흔적도 없었습니다.

마지막 기차는 이 역에서 몇 시에 떠났을까요.  아그네스 발차의 노래를 웅얼거려 봅니다.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

시간이 자취를 감춘 마을

타임캡슐 같은 마을이라는 수사가  

실은 아린 곳.


이곳이 액자 속 박제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시간이 멈추어도 삶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지요.

시간이 멈춘 마을에도 시간이 있습니다.


이전 12화 센텐드레의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