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 인 이탈리아
여행 할 때 만큼은 서로를 너무 믿지 않는게 좋을 지도 몰라
버스는 런던의 밤을 뚫고 달리고 달려, 스텐스테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해가 뜨기도 전인 아침인데도 공항에는 출국하는 여행객들로 가득하다. 어디를 보아도 여행의 즐거움에 들뜬 얼굴들.
확실히 봄 방학의 시작이 맞긴 하구나.
사람이 많아서 예상보다 출국 절차가 오래 걸렸지만 비행기를 놓치는 불상사는 없었는데, 불행하지만 다행하게도 출국이 1시간 지연되었기 때문이었다. 지연의 이유는 설명도 양해도 없었지만, 유럽 저가 항공에는 종종 있는 일이라서 인지 다들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2015년이었어요).
나는 그냥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추고 쉴 시간이 1시간 더 늘어서 오히려 감사했다.
기내 판매를 하는 승무원분들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다 깨다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눈을 뜨니 어느새 볼로냐에 도착했다.
드디어 이탈리아인가! 이탈리아 거리의 공기는 어떤 느낌일까! 토마토 향이 나려나? 길거리에는 멋진 옷을 입고 구두를 신은 멋쟁이들이 가득할까? (이탈리아 양복과 가죽이 좋다는 것을 어디서 들었다)
푹 자고나서 체력이 회복되니 이제야 여행의 설레임이 느껴지기 시작 했다. 그렇게 한동안 두근거리며 공항에서 대기했다가, 다른 항공편으로 도착한 웅지와 만나 볼로냐 시내로 이동했다.
공항에서 시내(센트럴 기차역)로 오는 것은 Aero라는 공항버스가 있는데, 도착한 사람들도 모두 같은 걸 타기 때문에 아무 정보가 없던 우리도 크게 어려움 없이 탑승할 수 있었다.
이른 오후의 청량한 캔디바 같은 하늘을 한동안 보고 있으니, 어느새 볼로냐 기차역에 도착했다. 버스 문이 열리자 포근한 햇살 냄새가 확 다가온다. 폭신한 솜이불 속에서 느끼는 선선한 에어컨 바람 같은 쾌적한 4월 초의 봄 날씨다.
볼로냐 센트럴 기차역은 버스 터미널이 같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사람도 정말 많았다. 동시에, 확연히 런던과 다른 건물과 사람들의 분위기에 이탈리아에 왔다는 실감이 나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거기에 이제 숙소만 가면 오늘의 고된 여정이 끝나고 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설렘까지 추가로.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하지만을 던져주지.
시내 외각에 있는 우리 숙소를 찾아가려면 93번 시내버스를 타야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93번 탑승장이 없는 것이다.
볼로냐의 버스정류장 지붕에는 해당 정류장에 정거하는 버스 번호가 쓰여있었는데, 구글 맵에 표시된 것과 달리 버스 터미널의 수많은 정류장 속에 우리의 버스 번호는 없었다.
여기서 타시오!라고 표시하는 디지털 지도를 믿고 많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버스 터미널을 몇 바퀴 돌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대로는 해결 안 되겠다 싶어, 기차역 내의 트랜이탈리아 직원을 잡아 길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데, 우리 과는 일러스트레이션 &애니메이션이지만 연기도 배운다고!?
* 연기를 배우는 이유 :
본인의 작품의 의도를 가장 잘 표현하려면 직접 연기 해보는 것이기 좋기 때문에 연기 수업이 있었다
(전문적인 수업까지는 아님).
특히 애니메이션 작업에는 직접 연기를 한 것을 촬영하여 작업의 참고 자료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움직임 참고를 위해), 내레이션도 동일하게, 학생들은 성우분을 섭외할 돈도 스케줄도 안되게 때문에 서로서로 목소리 연기 품앗이를 하여 작품에 사용했다.
연기 수업의 경험을 살려 바디랭귀지로 질문을 전달해 보기로 했다.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쑥스러움은 일 년간의 수업으로 이미 마비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최대한 크고 화려하게 파닥거려보았다.
다행히 뜻은 잘 전달되었고(뿌듯), 친절한 직원은 지도까지 가져와서 표시를 해주며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종이에 버스를 그리고 93? 이라고 써서 보여주었어도 통했을 것 같아..
아무튼 친절한 직원이 준 지도를 가지고 기차역에서 나와 정류장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93번 버스 정류장은 우리가 있었던 기차역의 버스터미널에 있지 않았고, 한참 따로 떨어져 있었다.
이제 이 지도대로 찾아가면 드디어 버스를 탈 수 있겠지!
그리고 30분 후,
우리는 아직도 정류장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도의 유무와 상관없이 길치는 길치이기 때문에.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쪽으로 열심히 걸어갔지만 도무지 우리의 93번 버스를 탈 수 있는 정거장은 보이지 않았다. 피곤함과 배고픔으로 정신이 흐려져 왔기 때문에 (새벽부터 먹은 게 없어!), 무용지물이 된 지도를 포기하고 행인들에게 길을 물어보기로 했다.
한참을 용감하게 주변 행인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기차역의 직원이 알려준 정류장을 찾아보았지만.. 이쯤 되면 예상하셨겠죠, 그 후 30분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어딘지 모르는 도로 위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염없이 어딘가를 걷다 보니 둥근 원형의 광장 같은 곳이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 행운? 93번 버스가 광장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서둘러 버스를 따라 달려가서 정차 하자마자 탑승했다. 만약을 위해 “산 시스토(San Sisto)” 가는 버스가 맞냐고 기사분께 확인했더니 맞다고 한다.
됐다! 이제 숙소로 가는 것만 남았어!
버스를 타고 얼마가 지났을까. 볼로냐 중심지에서 조금 외각으로 나가니, 중세의 건물들에서 현대식 주거단지가 되었다. 현대식이라고 해도 빌딩이 있다거나 그런 느낌보다는 한국의 오래된 빌라 단지의 느낌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관광 요소가 되는 부분은 정말 조금이구나. 볼로냐는 작은 소도시인가?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실상은 단순히 우리 숙소가 있는 방향이 주거지 위주였던 것뿐이었고, 볼로냐는 엄청 큰 도시였지만 말이다.
당시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는 그저, 고생 끝에 탄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소도시(오해)의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버스 밖 풍경은 어느새 집으로 가득 찬 거리에서 점점 집이 뜨문 뜨문 있는 한적한 거리로 바뀌어 갔고, 길을 잃고 헤매던 한낮의 오후에는 따갑고 뜨거웠던 햇살은, 3시가 넘어가자 적당히 따끈따끈해져 어깨 위로 포근하게 내려앉았다.
거기에, 열린 창문으로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 조용한 주택가의 옅은 소음, 간간히 차내 방송을 하다 말다 하는 기사님의 조용한 목소리를 들으며 한참 버스 안에서 덜컹거리며 있다 보니 졸음이 절로 왔다.
그래서 몰랐다. 우리가 내렸어야 하는 산 시스토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는 것을.
한참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톡톡 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랑 아까 광장에서 같이 탑승한 한 아주머니셨는데, 우리의 팔을 잡아 끄시며 어서 자기를 따라 내리라는 제스처를 하셨다. 얼떨결에 따라 내린 후 바디랭귀지로 이야기를 들어보니,
버스 기사님께 산 시스토 가냐고 물어보고 버스에 탄, 어떻게 봐도 관광객 같은 두 사람이 산 시스토 정류장에서 내리지 않고 졸다가, 창 밖만 보다가, 하고 있으니 고민하다가 도움을 주신 것이었다.
두 조난자를 구출한 아주머니는 친절하게도 다시 산 시스토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까지 알려주셨다. 도움에 감사를 표하고 헤어진 후, 알려주신 버스 정류장에 가서 노선표를 확인해 보았다.
와, 정말 많이도 지나쳤네!
너무나 바보 같은 실수에, 서로를 마주 보며 어쩜 둘 다 똑같이 아무 생각 없이 버스에 타고 있었지?
서로를 너무 믿나 봐 하고 한참 웃었다.
한바탕 그렇게 웃고 버스를 기다리며 멍하니 봄날의 여유를 즐기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마도 우리의 생각의 호흡이 비슷한게 아닐까.
나는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멍하니 있거나 생각에 잠겨 있는 편으로, 시간을 정하지 않고 찾아오는 생각의 순간 때문에 대화 도중에도 종종 말을 뚝 끊긴다. 마치 갑자기 정지 버튼이 눌러진 라디오처럼.
그런데 침묵이란 게 그렇다. 휴식과 사색, 그리고 탐구의 시간이 되기도 하지만 혼자가 아닐 때의 침묵은 상대에게, 내가 불편한가? 내 이야기가 재미없나? 관심이 없는건가 하는 오해를 줄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미안한 오해를 주지 않도록 타인과 있을 때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웅지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간혹 가다 마주치는 긴장이 풀려 나오는 나의 침묵에도 그러려니~ 했다.
처음에는 다른 친구들처럼 내 개성을 이해해 주어, 얘가 또 이러는구나 하고 각자 할 일을 하면서 그러려니~ 하는 줄 알았는데, 볼로냐에서 여행하며 알게 된 웅지는 그게 아니었다.
이해심이 많은 친구인 것은 여전히 맞지만, 자세히 보니 나를 이해해 주어 그러려니~ 하던게 아니라, 그냥 웅지도 나와 똑같이 멍을 때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대화 없이 한참을 앉아 있어도 둘 다 외롭지도 불편하지도 않고 그저 평온했던 거지. 같은 속도로 호흡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좋게 말하면 잘 맞는 무해한 듀오이고, 나쁘게 말하면 대책 없이 태평한 듀오는 사이좋게 침묵을 즐겼고, 잠시 후 도착한 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 방향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놓치면 안 되니까 웅지는 정류장 번호를 세고, 나는 지나가는 정류장의 이름들과 노선표를 보면서 확인하기로 했다.
몇 정거장이 지나고 인상적인 이름의 피콜로 카우 보이 정류장이 나오고 그 다음에 그리고 그리던 산 시스토가 나타났다.
드디어! 드디어 숙소에 도착인가!
우리의 숙소는 중심지에서 버스로 30-40분 걸리는 곳의 3박에 40유로(6만 원 정도) 짜리 호스텔.
가격은 매우 저렴 하지만 소개 사진에서 보인 시설은 가격 대비 아주 훌륭했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그런데.. 어디 있지?
보이는 건 거대한 공터와 폐가로 보이는 건물들 뿐, 예약할 때 사진에서 봤던 숙소는 어딜 봐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