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정말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같은 학과이긴 하지만 항상 단체로 움직였고 단둘이 어울린 시간은 글쎄, 하루? 거기다 웅지는 좀 멀리 떨어진 기숙사에 살았기 때문에 방과 후에도 늦게까지 함께 있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랬다 보니 이제 막 1학년으로 3/4를 보낸 봄 방학 직전의 우리 사이는 딱 그랬다. 서로를 좋게 생각하고 같은 농담에 웃으며 어울려 다니지만 서로의 집에 놀러 가거나 학교 수업이 없는 휴일에 시간을 내서 놀지는 않는 그런.
그런데 갑자기 여행을 가자고?
그녀의 속마음에 대한 고민은 길지 않았고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며칠은 방, 같이 써야하는데 괜찮아?
음..응!
낯은 가리지 않지만 밤은 가려서, 오랜 친구가 아닌 이상은 여행을 가서 잘 놀다가도 잠잘 때는 꼭 나 혼자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나인데, 이제 안지 일 년도 안 되는 그녀와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냥 왠지 괜찮을 것 같아.
너에 대해 아직 많이 알지 못하지만 왠지.
출국 전에는 학기 말이라 과제와 아르바이트 마무리로 딱 죽기 직전까지 바빴지만, 천만다행으로 웅지와 단 둘이 가는 게 아니라 같이 가는 그룹이 있어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여행 계획을 짜지 않아도 되었다.
거기다 짧은 여행이라 짐 또한 간단해서 여행 짐을 꾸리는 것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고.
(휴대용 티슈를 준비하는 걸 잊어서, 마침 있던 롤 휴지를 통째로.. 저렇게나 필요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학기 말 과제 마감이 이렇게 사람의 판단력을 흐립니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 왔다. 출발지는 3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스텐스테드 국제공항. 그리고 비행기 탑승 시간은 매우 이른 아침.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따뜻한 3월 말, 거기다 봄 방학의 시작이라서 그런지 이탈리아로 가는 교통수단은 대부분 예약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여행 그룹에 늦게 조인한 나는 일행과 같은 비행기 예약을 못해, 조금 먼 공항에서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되었다.
비행 시간도 기차가 아직 다니지 않는 시간이라 시내버스, 그 후에는 리무진 버스로 갈아타고 새벽의 런던을 가로질러 공항에 가야 한다.
첫 번째 버스는 정류장이 기숙사 바로 앞이고 매일 다니는 거리라 무섭지 않았는데, 리무진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걸어야 했던 런던 중심지의 거리는 좀 달랐다.
낮에는 관광객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거대한 런던 거리는 그 흔한 취객도 없이 텅 비어서 어딘가 리미널 스페이스를 연상케했다.
이 곳에서 움직이는 것은 오직 덜컹거리며 캐리어를 끌고 지나가는 나 뿐. 하지만 네온 불빛들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시간처럼 화려하게 깜박이고 있어서 어딘가 괴리감이 느껴졌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사람이 없는데도 많은 것들이 소리를 내며 움직였고, 어두운 틈새에서 무언가 으르렁 하며 나올 것 같았다. 나는 병원 갈때 말고는 쫄보가 아닌데, 여긴 너무 무서워!
*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 경계공간. 사람이 북적여야 할 장소가 비어 있거나 친숙한 장소가 이상하게 뒤틀렸을 때 불안한 감정을 주는 장소를 말한다. 예시 : 불은 다 켜져 있는데 사람만 없는 백화점)
해리포터 영화, 아즈카반의 죄수의 한 장면 중에 집을 나온 해리가 캐리어를 끌며 걷는 그 장면같이, 아무것도 없는 거리를 경계하며 어깨를 웅크리고 한참 걸었다.
사람이 나와도 무섭고, 유령이 나와도 무서워..!
탑승 장소에 도착해서 나의 나이트버스(공항 리무진 버스)에 오르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어두운 창 밖으로 런던의 상징인 빅 벤과 런던 아이의 불빛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정말 영화 속의 나이트 버스를 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머릿속에서 흐르는 BGM 은 해리포터 영화의 OST 가 아니라 신라의 달밤.
흘러가는 불빛들과 어우러져 오히려 낭만적이고 좋은 것 같아서 노래를 찾아 반복 재생으로 틀어놓고, 의자에 푹 잠겨 못다 잔 새벽잠을 잤다.
한잠 푹 자고 눈을 뜨면 공항이겠지?
신라의 달밤 - 현인 선생님 (둘 다 다른 느낌이라 둘 다 추천합니다)
재미있었던 일 :
이탈리아 기차를 예약하고 문의를 하려고 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 무언가의 이유로 메일을 보냈었는데, 다음과 같은 안내 메시지가 왔었다.
번역해봤더니 김정일, 오 뭘 찾는거야? 라는 다소 뜬금없어 우스운 글이 나왔다.
2024년인 지금 다시 번역해 보면 제대로 나온다. :D
' 이건 여행기로 쓰기엔 좀 어려울 수 있겠다.. '
그게 여행 당시 적어두었던 기록을 보며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었다.
나는 지독히 계획적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즉흥적이라, 여행을 가게 되면 모든 변수에 대비하여 철저하게 여행 계획을 짜는 편이다.
*주의 : P 성향을 가진 분들은 눈을 감고 아래 만화를 스킵해주세요. 체해요!
그런데 이 이탈리아 여행기에는 조사 단계가 없었다.
얼마나 없었나 하면, 아예.
그렇다면 이탈리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나 하면 그것 역시
역사적인 배경 조금,
피자와 파스타의 본고장,
그리고 지도가 부츠같이 생겼다 정도의 상식뿐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려고 봤더니 여행기에 소개할 만한 유명한 관광지나 맛있는 식당을 갔던 시간보다는, 길을 잃고 쫄쫄 굶은 상태로 이탈리아 고속도로 어딘가를 걷고 있던 시간이 더 길었다.
하지만 이 여행에는 너무 웃기는 일이 많았으니 묵히기는 아까워!
그래서 이렇게 생각을 바꿔 보았다. 일반적인 여행기 형식인,
“내가 다녀온 멋진 곳들을 소개한다! “ 에서
“당신은 나보다 더 잘 다녀올 수 있다!” 로 써보자! 로.
해서, 어쩌다 보니 거꾸로 된 이 여행기에는 볼로냐, 베네치아, 로마를 무계획으로 다녀온 두 사람의 에피소드와, 우리는 몰라서 못 갔던 멋진 곳들에 대한 정보를 포함할 예정이다.
그래서 이 글을 본 당신의 여행에 도움이 되고, 또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다시 떠날 나의 여행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 휴무일, 이동과 비용 등의 정보는 여행 시기와 경로마다 달라질 수 있어서 쓰지 않겠습니다.
* 정보 프로그램은 차후 출판을 위해, 유료공개 분량에만 포함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