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은우는 집 앞 골목 계단에서 놀고 있는 또래 남자 아이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못 보던 얼굴이었다. 동네 아이들답지 않게 뽀얀 얼굴과 세련된 옷차림이 다른 곳에서 온 아이 같았다. 은우는 자기네 집과 마주보고 있는 한옥 대문이 열린 걸로 봐서 맞은편 집 할머니네 손자가 놀러온 거려니 짐작했다. 맞은편 집 할머니네와 은우네는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가까운 이웃인데도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할머니 때문이었는데, 달동네에서 유일하게 부잣집 한옥에 사는 할머니는 동네 주민들을 업신여겨서 사람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고 인사조차 제대로 받지 않았다. 은우가 할머니네 대문 안을 들여다본 건, 은우네가 이 동네로 이사 온 첫날 엄마 심부름으로 이사 떡을 돌렸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금테 안경을 쓰고 늘 단정하게 쪽 찐 머리를 하고 다니는 할머니는 마주칠 때마다 큰 소리로 머리 숙여 인사하는 은우에게 건성으로라도 대답 한번 해 주지 않았다. 그런 비호감 할머니의 손자로 짐작되는 아이이니 만큼 못 본 척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아이의 손에 들려 있는 얌체공이 은우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 너, 이 집에 왔니?
- 응.
- 나는 여기 살아. 근데, 너 몇 살이야?
- 여덟 살..
- 어? 나도 여덟 살인데..
- 너, 이사 왔어?
- 응.
- 그럼 학교는?
- 전학 왔어. 소월국민학교에..
- 어? 나도 소월국민학교 다니는데.. 1학년 4반 11번. 너는 몇 반이야?
- 아직 몰라. 내일 가면 알려 준댔어.
- 근데, 너 어디서 이사 왔어?
- 서울.
- 아..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아이가 조몰락거리던 얌체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은우가 ‘우리 같이 놀래?’라고 묻자, 아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가 보기에 아이는 밖에서 놀아 본 경험이 많지 않는 것 같았다. 엄청난 탄력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얌체공을 둘이서 주고받는 시간보다 아이가 받다가 놓친 얌체공을 주우러 가는 시간이 더 길었다. 은우 입장에선 아이의 무딘 운동 신경 탓에 얌체공을 주고받는 재미가 덜해서 좀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자기한테는 없는 얌체공을 가지고 놀 기회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 민영아, 뭐 하니?
이번에도 얌체공을 받다가 놓쳐서 주우러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은우의 뒤에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할머니!
얌체공을 주워 들고 달려온 아이의 어깨를 감싼 옆집 할머니는 못마땅하게 은우를 쳐다보더니
- 가자, 민영아. 점심 먹자. 할머니가 고기 사 왔어.
- 할머니, 은우도 소월국민학교 다닌대요. 1학년 4반.
할머니는 대꾸 없이 민영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은우네 대문 앞에 내팽겨진 은우의 책가방을 본 할머니는 은우의 얼굴을 한번 더 흘겨보았다.
얼굴을 익힌 은우와 민영이는 첫 만남 이후로도 계속 어울렸다. 등하굣길을 함께 하기도 했고 학교를 마치고 와서는 거의 매일 같이 놀았다. 하지만 항상 한창 재밌게 놀 때 민영이를 불러들이는 할머니 탓에 노는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다. 민영이와 놀면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더 반갑게 자신을 봐 줄지도 모른다는 은우의 기대 또한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집 안에서 민영이를 부르러 나오실 때나 외출에서 돌아오시면서 민영이를 데리고 들어갈 때, 종종 할머니 손에는 아이스크림이나 과자가 들려 있었는데.. 언제나 한 개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을 보러 가셨던 할머니가 돌아오자 민영이는 할머니를 따라 들어가다
- 할머니, 나 은우랑 더 놀다 들어가면 안 돼요?
예상치 못한 민영이의 말에 놀란 건 할머니나 은우나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대답 대신 민영이의 손을 잡아끌었고, 민영이는 손을 빼며 거부했다.
- 더 놀다 들어갈래!
당황한 할머니는 지켜보고 있던 은우를 흘겨보더니 싫다는 민영이를 억지로 끌고 들어갔고, 문이 닫히자마자 은우의 귀에 들리는 소리..
- 저렇게 못사는 애들하고 어울리면 안 돼. 이제 학교 가는 길도 알았으니까, 내일부터 학교도 혼자 가.
그 뒤에 민영이가 뭐라고 반박하며 대드는 것 같았지만 은우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민영이네 할머니가 그토록 못마땅한 자신을 왜 그동안 민영이랑 놀게 했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고 나니, 허망한 분노가 차오를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은우는 민영이가 나오길 기다리지 않고 먼저 학교로 향했다.
- 은우야, 같이 가자!
은우는 뒤에서 뛰어오는 민영이를 기다렸다가, 헐떡거리는 민영이에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 나 이제 너랑 안 놀 거야. 이제 학교도 너 혼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