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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명운 Jul 23. 2018

9. 고추잠자리

  완연한 가을이었다.

은우는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젠 제법 컸다고 무리를 이루어 다닐 줄 알았고 같은 동네에 있는 또래들 얼굴은 다 익혔다. 딱지치기, 술래잡기, 망까기, 말뚝박기 등 이런저런 놀이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무리에 섞이기 시작하면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놀이들도 배웠다.

  무리가 생기면 주도하는 편과 동조하는 편이 있기 마련. 은우는 후자에 속했다. 운동 신경이나 머리가 그닥 나쁜 편이 아니어서 충분히 주도하는 편에 설 수도 있었지만, 숫기가 없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굳이 골목대장이라고까진 불리지 않았지만, 주도하는 편에서도 중심에 있는 아이는 창민이었다. 창민이가 덩치가 가장 크다든가 운동을 제일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또래 중에 체격이 큰 편에 속했고 무엇보다 적극적이고 시원시원한 말투가 창민이가 무리를 주도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창민이와 항상 붙어 다니는 민수.. 은우는 또래 중에 민수가 제일 불편했다. 특별히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고, 딱히 싫어할 만한 이유도 없었지만 왠지 모를 불편함은 민수와의 거리감을 좀처럼 좁혀 주지 않았다.

  - 이제 뭐 할까?

  망까기가 끝나자 창민이가 말했다. 다들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아이들 사이로 날아들었다.

  - 우리 잠자리 잡자!

  키가 제일 작은 준호가 말을 꺼내자 모두들 반갑게 동의했다. 잠자리채가 있는 아이들은 집에서 채를 가지고 나왔고, 없는 아이들은 없는 대로 맨손으로 잡기로 했다. 은우는 잠자리채가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엄마는 회사에 있었고, 설사 엄마가 집에 있었더라도 잠자리채를 살 돈을 줄 리가 없었다.  

  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공원에 도착한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잠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먼저 잠자리를 잡은 아이들은 역시나 잠자리채가 있는 아이들이었다. 채에 걸린 잠자리를 꺼내 자랑하는 아이들이 은우는 몹시 부러웠지만, 손으로 잡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잠자리가 앉았을 때 순간적인 타이밍만 잘 맞추면 검지와 중지 사이로 잠자리의 한쪽 날개를 잡아챌 수 있었고, 일단 한쪽 날개만 제대로 잡히면 그걸로 끝이었다. 나머지 한 손으로 파닥거리는 반대쪽 날개를 잡아 포개면 잠자리는 결코 날아갈 수 없었다. 은우는 풀잎 위에 앉아 있는 잠자리를 노리고 다가가며 검지와 중지를 벌렸다.

 

  채를 가지고 잠자리를 낚아채는 아이들 틈에서 제일 먼저 맨손으로 잠자리를 잡은 건 민수였다. 잠자리채가 없는 아이들에게 그건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었고, 은우 역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잠자리를 잡는 데 집중했다. 민수 이후로 맨손으로 잠자리를 잡는 아이들이 하나둘 나올 때마다 은우는 초조했는데, 말 없는 경쟁 속에서 꼴찌가 되거나 단 한 마리도 못 잡는 불행을 경험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 천천히 다가가서 순식간에 잡아야 돼.

  이제 막 망설이다 또 한 마리를 놓친 은우의 뒤에서 민수가 말했다.

  - 자, 봐 봐.

  민수는 양손에 있던 두 마리 잠자리 중 한 마리를 날려 보내고, 이제 막 풀잎에 앉은 잠자리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은우는 민수가 잡고 있다 날려 보낸 잠자리를 차라리 자신에게 주었더라면 하고 아쉬워했지만, 속마음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민수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벌리고 아주 천천히 다가가는가 싶더니 잠자리의 한쪽 날개를 가위로 자르듯 싹둑 잡아챘다. 다가갈 때는 소리 없이 천천히, 날개 근처에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순식간에.

  - 자, 봤지?

  이내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가는 민수의 뒷모습이 은우는 어쩐지 불편했지만, 민수가 보여준 시범이 분명 도움이 되긴 할 것 같았다.

  은우는 민수가 보여준 것처럼 신중하게 접근해서 과감하게 잠자리 날개를 잡아채는 방법으로, 민수의 시범 이후 세 번째 시도 만에 맨손으로 잠자리를 잡았다. 은우는 잠자리를 잡은 것도 기뻤지만, 자신만 못 잡을 것 같은 불안감에서 벗어난 것에 큰 안도감을 느꼈다. 방법을 터득한 은우는 금방 또 한 마리를 잡아서 양손에 잠자리 날개를 쥘 수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은우는 양손에 잠자리가 있어서 더 이상 잠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되자, 아직 한 마리도 못 잡은 광철이에게 한 마리를 주고 또 잠자리 잡기에 나섰다. 이어서 금방 또 한 마리를 잡은 은우를 비롯한 아이들은 이제 잠자리를 잡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잡은 잠자리를 보관하는 게 문제였다. 잠자리채가 있는 아이들은 있었지만 곤충 채집통이 있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나마 잠자리채가 있는 아이들은 잡은 잠자리를 채 끝으로 몰아넣은 후에 잠자리채를 땅에 뒤집어 놓고 다시 맨손으로 잠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채가 없는 아이들은 양손에 세 마리 이상을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개중에 솜씨 좋은 녀석들은 손가락 사이마다 잠자리를 잡고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잠자리를 계속 잡으려면 어차피 한 손은 비워 둬야 했기 때문에 아무리 솜씨가 좋아도 네 마리 이상을 잡고 있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은우가 생각해 낸 것이 비닐봉지였다. 바닥에 날리는 비닐봉지나 쓰레기통에 버려진 비닐봉지를 주워 거기에 잠자리를 가뒀다. 봉지에 가두다 오히려 잠자리를 놓치는 아이들도 간혹 있었지만, 비닐봉지에 잠자리를 가두고 봉하면 나머지 한 손으로 얼마든지 또 잠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비닐봉지를 획득한 아이들의 관심사는 이제 누가 잠자리를 가장 많이 잡느냐였다. 아이들은 공정을 기하기 위해 지금껏 잡은 잠자리를 모두 놓아주고 잠자리채는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비록 첫출발은 늦었지만 자신감이 생긴 은우는 1등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각기 경쟁 모드에 돌입한 아이들은 모두들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진지하게 사냥에 나섰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딱히 시간을 정하지도 않고 시작한 아이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질 무렵 누군가의 입에서 ‘이제 그만하자!’라는 얘기가 나왔고, 그 소리가 가까이부터 멀리까지 있는 아이들에게 전파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둘러앉은 아이들은 각자 잡은 잠자리 수를 세기 시작했고, 제일 많이 잡은 아이는 11마리를 잡은 민수였다. 다음은 의외로 소심하고 숫기 없는 대영이가 8마리, 그리고 3등이 7마리인 은우였다. 결과 발표가 끝나자 잠자리를 놓아주는 아이들도 있었고 그대로 비닐봉지를 봉하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이제 다시 모두의 관심사는 다음에 또 무엇을 하느냐였다.

  - 우리 잠자리 시집보낼까?

  민수가 말을 꺼내자 은우처럼 무슨 말인지 몰라 의아해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의미를 알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는지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집이 가장 가까운 석주가

  - 내가 집에서 실 가지고 올게.

  - 그게 뭔데?

  ‘잠자리 시집보내기’의 의미를 묻는 범준이를 보고 씨익 웃어 보인 민수는 가까운 곳의 낮은 나무에서 가장 얇은 잔가지를 꺾어 손으로 훑은 다음 비닐봉지 안에서 잠자리 한 마리를 꺼냈다. 은우가 뭔가 불길한 느낌으로 민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검지와 중지로 잠자리의 양쪽 날개를 포개 잡은 민수는 잠자리의 꼬리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엄지로 받쳐서 눌러 주며 세 손가락을 오므리더니, 꼬리 끝으로 그 뾰족하고 얇은 잔가지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대로 쑤셔 넣는 것이었다. 은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경악했지만, 꼬리에 가지가 박힌 채 온몸을 바동거리는 잠자리를 보고 신나 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때마침 석주가 실패를 가져오자, 민수는 실 끝을 발로 밟고 허리춤까지 늘여서 끊어 잔가지 끝에 묶고는 다른 한쪽은 자기 검지에 묶었다. 진짜 신기한 건 그때부터였다. 곧 죽을 줄만 알았던 잠자리가 꼬리 끝에 박힌 가지의 무게를 이겨 내고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민수는 손가락 끝에 묶인 실이 팽팽해질 때마다 검지를 까딱거려 잠자리를 희롱했고, 잠자리는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팽팽해진 실이 당겨지는 고통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은우는 차라리 잠자리가 빨리 죽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잠자리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강했다. 민수가 실이 묶인 검지를 치켜들고 달리기 시작하자, 실로 당겨진 잠자리는 민수를 따라 날면서 끌려갔다. 이걸 왜 잠자리 시집보낸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은우는 그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석주는 아이들에게 실을 끊어서 나눠주기 시작했고, 실을 받은 아이들은 제각기 잠자리의 꼬리에 잔가지를 들이댔다. 개중에는 너무 두꺼운 가지를 들이대는 바람에 잠자리 꼬리를 터트려 죽게 하는 아이도 있었고, 죽지는 않았어도 꼬리가 무거워 날지 못하는 잠자리도 있었다. 그런 잠자리들은 이내 아이들 발에 밟히고 말았는데, 은우는 이런 광적인 놀이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이미 구역질을 억지로 참고 있었던 은우는 아이들이 터트린 잠자리 분비물 때문에 속이 더 울렁거렸다. 은우는 이 메스껍고 잔인한 놀이에서 빠지고 싶어서 슬며시 뒤로 물러났고, 천만다행으로 석주가 가져온 실이 모자라는 바람에 은우에게까지 차례가 오지 않았다. 실을 받은 아이들은 잠자리를 매달고 달리기 시작했고 은우는 그 뒤를 최대한 천천히 따랐다. 상황을 봐서 아이들 모르게 집으로 가는 골목길로 빠질 생각이었다.

  - 야, 우리 공터로 가자!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잠자리를 매달고 신나게 달리고 싶었던 아이들은 자연스레 큰 공터가 있는 아랫동네로 향했고, 기회다 싶었던 은우는 그 뒤를 따르면서 아이들 모르게 골목길로 빠졌다. 은우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긴장을 풀려는 찰나

  - 은우야!

  예상치 못한 부름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민수였다. 민수는 아직 큰길로 접어들지 않은 아이들을 향해

  - 야, 우리 이 길로 내려가자!

  뒤따르던 아이들은 민수의 지시대로 은우의 집 앞을 지나는 골목길을 우르르 뛰어 내려갔다. 그런데 정작 민수는 아이들이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 은우야, 너는 안 해?

  - 어? 어.. 실이 모자라서..

  - 여기 니네 집 아니야? 집에 실 있을 거 아냐?

  - 어? 어.. 어딨는지 잘 몰라서..

  은우는 실패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지만 거짓말이라도 해서 빨리 이 위기를 모면하고 싶었다.

  - 징그러워서 못하는 건 아니고?..

  정곡을 찔린 은우는 움찔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웃으며

  - 아니. 징그럽긴 뭐가 징그럽냐?

  - 그럼 해 봐.

  민수의 여유 있는 도발에 물러서고 싶지 않은 오기가 발동한 은우는

  - 그까짓 게 뭐가 징그럽다고? 애들 다하는 거.. 근데 실이 없어서 안 돼.

  - 그래?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인 민수는 자기가 잡고 있던 잠자리의 꼬리에서 잔가지를 천천히 빼내더니, 잠자리 날개를 잡고 있던 손가락을 은우가 보란 듯이 벌렸다. 허공에 버려진 잠자리는 제대로 날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고, 떨어진 땅바닥에서 꼬리를 말며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더니 점차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은우가 그 광경을 보며 올라오는 구역질을 억지로 참고 있을 때, 민수의 발이 잠자리를 밟고 비벼댔다.

  - 자, 찔러 봐.

  민수가 내민 잔가지에는 분비물이 묻어 있었고, 그걸 본 은우의 머릿속은 토사물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이미 입 속에는 위(胃)에서 올려낸 내용물이 가득 차 있었지만 은우는 혼신의 힘으로 그것들을 다시 삼켰다. 은우는 민수가 왜 이렇게 잔인한지, 그리고 왜 유독 자기한테 집요하게 매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 싫어!

  - 응?

  - 징그러워서 못하는 게 아니라, 하기 싫어!

  의외의 반격에 몰린 민수는 잠깐 당황한 듯싶더니

  - 그래, 알았어.

  순순히 물러서서 먼저 간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민수가 골목길로 사라지기가 무섭게 은우가 간신히 목구멍으로 삼켜 눌렀던 내용물들이 은우의 입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 은우야~ 노올자아.

  은우는 동생 은수와 먹은 아침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대문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친구들의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일찍 친구들이 찾아오는 건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한둘이 아닌 꽤 많은 아이들의 목소리..

  은우가 반가우면서도 의아한 기분으로 대문을 열었을 때, 무리 한가운데 민수가 서 있었다.

  - 은우야 놀자.

  - 어? 응.. 잠깐만~

  은우는 은수에게 먼저 나간다는 말을 남기고 민수를 따라 나서긴 했지만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근데, 어디 가는데?

  - 잠자리 잡으러.

  - !

  - 자, 실.

  민수가 건넨 하얀색 실은 보통 바느질용 실보다 굵은 이불을 꿰맬 때 쓰는 실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실을 받아든 은우는 긴장을 감추며

  - 이렇게 일찍?

  - 뭐 어때? 어차피 노는 건데.

  은우는 공원으로 가는 아이들의 뒤를 따르며 갑자기 잠자리가 전부 없어지기라도 해서 잠자리 잡을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공원으로 가는 언덕 초입부터 이미 한두 마리씩 보이기 시작하는 잠자리를 보며 터무니없는 기대를 하고 있음에 좌절했다.

  최대한 걸음을 늦게 해서 올라간 공원은 은우의 바람이 무색하게 잠자리 천지였다. 아직 볕이 그닥 따뜻하지도 않은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공원의 모든 잠자리들이 마치 오늘을 마지막으로 전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여기저기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아이들은 제각기 잠자리를 잡으러 흩어졌지만 민수는 은우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은우는 더 이상 민수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결단을 해야 했다. 싫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든지, 징그럽고 잔인하다는 생각을 감추고 행동에 옮기든지. 마음속으로는 싫다고 말하고 빠지고 싶었지만,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말함으로써 따라올 겁쟁이라는 꼬리표가 싫었다. 집요한 민수가 그 꼬리표에서 쉽사리 자신을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또 한편으론 다른 모든 아이들이 다 하는 걸 자신만 못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걸.. 안 한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위기를 넘기려는 건 스스로도 비겁해 보였다. 은우는 민수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 행동에 옮길 것을 결심했다.

  - 우리도 잡자!

  은우는 어제 터득한 방법대로 잠자리를 잡기 시작했지만 금방 잡을 수는 없었다. 방법이 틀려서가 아니라, 손끝의 감각을 살리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유난히 빨간 꼬리를 가진 고추잠자리가 눈에 들어왔을 때, 은우는 어쩐지 이 잠자리가 자신을 민수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해 줄 첫 번째 희생양이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잠자리의 꼬리색이 너무도 예뻤기 때문이었다. 다른 잠자리들보다 유독 더 밝고 짙은 새빨간 꼬리.. 은우는 바라볼수록 빠져드는, 신비감마저 감도는 그 예쁘디예쁜 붉은색의 꼬리에.. 때로 몸이 먼저 기억하는 것들이 있다. 은우의 눈과 정신이 잠자리 꼬리의 매혹적인 붉은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은우의 두 손가락은 어느새 이 가엾은 잠자리의 한쪽 날개를 가위잡고 있었다. 한쪽 날개를 잡힌 채 파다닥거리는 잠자리의 몸짓에 비로소 붉은색의 황홀경에서 벗어난 은우는 자신의 희생양이 될 첫 번째 잠자리가 하필 이렇게 예쁜 색깔을 가진 잠자리라는 게 못내 안타까웠다.

  - 자.

  은우가 아직 미처 잡지 못한 잠자리의 반대쪽 날개를 마저 정리하기도 전에 민수가 내민 예리한 잔가지. 은우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미 다른 한 손이 민수가 내민 잔가지를 받아 들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고 은우는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로봇 같았다.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잠자리는 은우의 왼손으로 옮겨졌고, 위아래로 꿈틀거리던 잠자리의 꼬리가 은우의 세 손가락에 잡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순간을 예리한 잔가지가 파고들었다. 가지에 뚫린 꼬리에서 나온 건 다른 잠자리들의 것과 다를 바 없는 황갈색의 분비물이었지만, 은우에게는 그 매혹적인 붉은색의 꼬리가 잔가지에 뚫릴 때 튄 붉은 피가 자신의 눈에 들어간 것 같은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환각을 통해서 은우는 비로소 프로그램된 로봇에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제서야 자신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를 영혼이 깃든 상태로 인지할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은우가 마주하고 있던 것은 이미 예상하고 각오했던 토악질이 아닌 뜻밖에도 생명에 대한 죄책감이었는데, 은우는 그 죄책감에 반(反)하기라도 하듯 잠자리가 잡히는 족족 사정없이 잔가지를 들이댔다.

  은우가 생명으로부터의 도피라는 또 다른 환각에서 깨어났을 때.. 은우는 친구들과 함께 달리고 있었고, 위로 쳐든 오른손 검지 끝에는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실에 묶여 날고 있었다.


  땀이 날 정도로 신나게 뛰놀면서 은우는 어느새 혐오스러웠던 기억을 잊게 만드는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려울 뿐이다. 특히나 여럿과 함께 공모하는 일은 본능적인 죄책감조차 혼자만 느꼈던 감정의 과잉쯤으로 여기게 만들고..

  - 아~ 배고프다.

  준호가 먼저 허기짐을 표하자 모두들 잊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 낸 것처럼 ‘나도’라는 말이 이어졌다.

  - 배고프면 이거 먹으면 되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수는 실에 묶여 있던 잠자리 머리를 떼어 입 안에 넣고 씹었다. 그걸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갔던지 비닐봉지 안에 있던 잠자리 머리도 있는 대로 떼어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은우는 경악했지만, 더 경악스러웠던 건 준호의 다음 말이었다.

  - 맛있어?

  - 응, 고소해.

  거의가 동조했던 잠자리 시집보낼 때와 다르게, 대부분 은우처럼 경악했던 분위기는 준호의 한마디와 민수의 대답에 급반전되었다.

  - 그럼 나도 먹어 볼까?

  준호는 손가락으로 굴리고 있던 잠자리 머리를 입 안에 넣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도 모른 채,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오물거리던 준호는 뭔가 부족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내 잠자리 머리를 몇 개 더 떼어 한꺼번에 입 안에 털어 넣고 다시 씹기 시작했다.

  - 으으음~ 맛있다. 정말 고소한데~

  은우는 ‘이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동의를 구하려 주위를 둘러봤지만, 호기심과 환희로 가득 찬 아이들의 눈에서 자신과 같은 혐오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아이들은 하나둘씩 저마다의 잠자리 머리를 떼어 입에 넣고 있었고, 그 가운데 어쩌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

  - 은우 너는?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듯, 은우를 제외한 아이들 전부가 입을 오물거리며 생각보다 맛있다는 표정으로 잠자리 머리를 씹고 있을 때, 민수가 던진 말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한 은우는 아무 말 없이 실 끝에 매달린 잠자리 머리를 떼어 입에 넣고 씹었다. 그리고 비닐봉지 안의 잠자리들도.      


  이후에 무얼 더 하다 집에 돌아왔는지 은우는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지만 민수와 좀 더 친해진 것만은 분명했다. 서로 가까워졌다기보다, 민수가 자신을 더 이상 감시나 경계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에 은우는 만족해야 했다.      


  은우는 공터에 혼자 남아 있었다. 바닥에는 머리가 없는 잠자리 사체가 즐비했는데, 그중에서도 꼬리에서 유독 붉은 빛을 뿜어내는 고추잠자리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은우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 고추잠자리를 집어 들었는데, 잠자리는 마치 아직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더 강한 기운의 붉은 빛을 뿜어내면서 꼬리를 꿈틀거렸고, 꼬리가 움직일 때마다 잠자리의 사라졌던 머리가 조금씩 생겨났다. 은우는 흠칫 놀라 잠자리를 떨어뜨렸고, 잠자리의 머리는 계속 커지더니 급기야 공터를 가득 메우며 은우의 시야를 덮었다. 은우는 벽에 등을 지고 있어서 도망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잠자리의 그 커다란 머리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는데, 잠자리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커다란 머리가 수천수만 개로 쪼개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수천수만으로 갈라져 있던 머리들이 다시 하나로 합쳐진 잠자리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은우에게 달려들었다.

  - 으아아아아!~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난 은우의 입에서 토사물이 쏟아졌다. 은우가 처음 잠자리 꼬리에 잔가지를 쑤셔 넣을 때 보았던 황갈색 분비물과 같은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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