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장면들 (6)
카페에 들러 아이스커피 두 잔을 사 가지고 돌아오는데, 사장님이 노점 앞에 나와 계신다. 사장님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온 젊은 엄마 손님을 응대하고 있다. 나는 노점 반대편에 서서 손님이 갈 때까지 기다린다. 횡단보도의 녹색 등이 켜지고, 건너편에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한꺼번에 쓸려 들어온다. 지나가는 사람들 틈 사이로 사장님의 모습이 보인다. 서로 더 예쁜 양말을 사겠다고 토닥토닥 실랑이를 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사장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노점을 나선 엄마와 두 딸이 길 저편으로 사라진다. 사장님은 그들의 뒷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진열대의 양말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나는 커피를 들고 사장님에게 다가갔다.
“아유 시원한 거 사 왔네. 고마워요.”
사장님이 커피를 받아 들고 색색의 양말이 놓인 진열대 뒤쪽으로 가서 앉는다. 스타킹을 입힌 마네킹 다리들이 진열대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사장님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다. 사장님이 커피를 빨대로 휘, 젓자 달그락, 얼음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사장님이 손에 든 컵을 바라보며 말한다.
“우리 딸은... 나 안 좋아해.”
“아…. 그래요?”
사장님이 커피를 한 모금 빨아 삼킨다.
“엊그저께가 어버이날이었잖아. 중학생 남자애 하나가 우리 가게에 왔어. 카네이션 다발을 들고. 양말을 사러 온 거야.”
사장님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내가 걔한테 ‘양말 누구 주려고?’ 그랬더니 엄마랑 할머니 준대. 그래서 내가 ‘엄마랑 할머니가 아기자기한 거 좋아하시니, 아니면 고급스러운 거 좋아하시니?’ 그랬더니 둘 다 고급스러운 걸 좋아한데. 그래서 내가 그럼 엄마는 이거, 할머니는 이거, 이렇게 딱 권해줬지. ‘이 꽃도 엄마랑 할머니 주는 거야?’ 그랬더니 그렇대. 그래서 내가, ‘야 기특하다 너. 정말 기특하다’ 그랬어. 정말 내 아들같이 너무 기특한 거야 걔가. 내가 걔한테 계속 주책맞게 아이고 예뻐라, 너무 예뻐라 그랬어. 생각해봐. 걔 용돈이 뭐 얼마나 되겠어. 내가, 너 어린이날에 용돈 많이 받았어? 그랬더니 조금 받았대. 근데 그걸로 사는 거래. 그때 받은 돈으로 선물을 사는 거야. 엄마랑 할머니 준다고. 내가 그 애한테 너무 감동받았잖아. … 근데 뭐 애가 어버이날에 부모님 선물 사다 주는 게 크게 특별한 일은 아니잖아. 늘 있는 일이잖아. 근데 그런 게 참… 부러울 때가 있어. 대통령이 부러운 게 아니고 그런 게 부러워.”
스물대여섯 즈음 되어 보이는 여자 둘이 지나가다가 노점 앞에서 멈칫한다. 야, 이거 예쁘지 않냐. 귀엽다. 색깔도 완전 귀여워. 살까? 음… 야 밥 먹고 와서 다시 보자, 들고 다니기 귀찮으니까. 사장님이 말을 잇는다.
“엄마랑 딸 손님이 우리 가게에 올 때가 있잖아. 둘이 수다 떨면서 엄마 이건 어때, 엄마한테는 이게 어울린다, 이거 너무 예쁘다, 뭐 그런 얘기 하는 거 보고 있으면…. 너무 부러운 거야.”
“딸 애랑은… 이렇게 지낸 지 한참 됐어. … 일이 좀 있었는데… 나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딸은 그게 아니었나 봐. 10년도 넘은 일인데 아직도 그래. 나랑 말도 잘 안 해. 같이 안 산지도 한참 됐으니까 걔가 일부러 집에 찾아오거나 통화를 해야 서로 말을 하고 사는데. 안 그러니까. 해야 하는 말 있으면 지 아빠한테 하고 내 전화는 받지도 않아. … 난 고민 같은 거 없어. 우리 딸 말고는. 돈도 없고 빚만 많지만. 돈이야 벌면 되잖아. 그런 건 다 상관없어. 근데 딸하고의 관계는… 한 번 깨져버리니까 잘 안 붙어. 깨진 병처럼 붙지가 않아.”
횡단보도의 녹색 등이 켜지더니 길 건너편에 있던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노점이 있는 거리로 다시금 쏟아져 들어온다. 거리에 말소리, 웃음소리, 음악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이의 비명 소리가 가득하다. 거리의 온갖 소음 탓에, 나는 사장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겨우 이해한다.
“그냥…. 보고 싶어…. 자꾸 봤으면 좋겠어….”
Scenes from Life는 사람들의 실제 삶의 장면들을 담은 영상•글 시리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