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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지 Oct 27. 2024

마호가니 테이블 3

아무렇게나 쓰는 소설 

(2편에서 이어짐)



“뭐 하냐 니?”


도현이 비웃음인지 쓴웃음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막 일어난 도현의 머리는 하늘 위로 어지럽게 뻗쳐 있었고, 입가에는 자다 흘린 침이 마른 허연 자국이 나 있었다. 도현이 하품을 하며 빨간 양념 얼룩 같은 게 묻은 흰 티셔츠를 들어 올리고 배를 벅벅 긁었다. 


정미는 출근 전 현관문에 서서 거울을 보고 있었다. 평소의 정미는 출근하기 전에 거울을 보지 않았다. 아니, 거울 따위를 볼 시간이 없었다. 늘 출근 시간 15분 전에 일어나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양치도 하고, 옷도 입어야 하기 때문에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체크할 시간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안경을 쓰고 잡동사니가 든 배낭을 한쪽 어깨에 맨 채 젖은 머리를 날리며 현관문을 뛰쳐나가는 게, 보통날의 정미의 출근 모습이었다. 


오늘의 정미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얼굴에는 진한 색조화장이 칠해져 있었다. 진달래색 립스틱, 살구빛 볼터치, 짙은 마스카라.... 옷차림도 평소의 정미의 차림과는 딴판이었다. 딱 붙는 빨간 목폴라 배꼽티에 헐렁한 청자켓을 걸치고 있었고, 통 넓은 하얀 바지 아래에는 높이가 7cm는 되어 보이는 듯한 통굽 구두를 신고 있었다. 엉덩이 한쪽에는 손바닥 두 개 만한 작은 크로스백이 달랑거리고 있었고, 머리 위에는 선글라스가 올려져 있었다. 


“야 존나 웃겨. 그 옷은 다 어디서 난 건데?” 

도현이 피식거리는 웃음을 내뱉으며 물었다. 정미는 답하지 않았다. 돌아보지도 않았다. 마치 도현이 그곳에 없는 것처럼, 거울 안에 비춘 자신의 모습에만 집중했다. 


“어? 그 목걸이, 어제 그거 아냐?” 


도현이 말했다. 정미의 가슴 아래 드러난 하얀 뱃살 위로, 은색의 커다란 태양 모양의 메달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정미가 표정 없는 얼굴로 도현을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뒤로 돌아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퇴근 후 평소보다 조금 늦게 돌아온 정미의 머리칼은 잔뜩 부풀려져 있었다. 파마를 한 모양이었다. 양손에는 쇼핑백이 가득했다. 


“저녁 안 먹었지?” 


정미가 말했다. 식탁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도현이 깜짝 놀라 정미를 돌아봤다. 평일에는 각자 저녁을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게 몇 년 전부터 암묵적으로 이어져온 그들 사이의 규율이었다. 도현은 오늘 점심을 늦게 먹은 터에, 조금 쉬다가 배달음식이나 시켜 먹을 생각이었다. 정미는 부엌에 쇼핑백을 내려놓더니 백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었다. 앞치마였다. 


“뭐냐 그건, 안 어울리게?” 


도현이 소리 내서 웃었다. 빨간색 목폴라 위로 덧대어진 샛노란 체크무늬 앞치마.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에 웃기는 했지만 다시 보니 그리 안 어울리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아주 잘 어울렸다. 짙은 아이섀도가 칠해진 눈두덩이 아래, 정미의 그윽한 두 눈이 도현을 웃음기 없이 바라봤다. 


“된장찌개, 괜찮아?” 

정미가 물었다. 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된장찌개 괜찮냐고.” 

“어?..... 어.... 좋아….” 


도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정미가 도마를 꺼내 양파를 썰기 시작했다. 도현의 눈앞에서 하얀 통바지를 입은 정미의 엉덩이가 살랑거렸다. 





토요일 아침. 정미와 도현이 현관문을 나왔다.


정미는 한껏 꾸며 입은 모습이었다. 잔뜩 부풀어 올린 긴 파마머리. 짙은 아이라인과 마스카라. 두툼하게 바른 파운데이션. 살구빛 볼터치와 빨간 립스틱. 청자켓 아래로 입은 딱 달라붙은 하얀 목폴라 배꼽티. 은은한 꽃무늬가 박힌 하얀색의 긴 시폰 스커트. 통굽으로 된 까만 가죽 부츠. 그리고 가슴을 가로질러 배꼽 위에서 반짝이는 은색 태양. 


도현 역시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머리 손질이 귀찮아 늘 바짝 깎아 올렸던 머리카락이 이제는 꽤 자라 있었다. 가르마는 한쪽으로 얌전히 태우고 왁스로 깔끔하게 고정시켰다. 새까만 머리 아래로 깔맞춤을 한 듯 까만 가죽잠바가 번쩍거렸고, 그 속은 남색과 흰색이 섞인 체크무늬 남방 차림이었다. 도현이 손목에 찬 롤렉스 시계를 들여다봤다. 오전 11시였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번쩍이는 전자 광고판을 혼이 나간 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도현과 정미가 차례로 바깥으로 나갔다. 광고판을 바라보는 남자아이를 남겨둔 채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지상 주차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토요일 아침부터 일요일 아침까지가 일주일에 한 번 재활용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어제 오후부터 경비원들이 비워놓은 주차 공간에 커다란 포대자루들이 여러 개 정렬하게 놓여있었고, 이제 막 일어나 대충 아무 옷이나 걸치고 나온 사람들이 어슬렁거리며 재활용 쓰레기를 분류해서 버리고 있었다. 또각또각. 토요일 아침 아파트 주차장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구두굽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쓰레기를 버리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봤다. 정미와 도현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90년대 패션잡지의 스트리트 사진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에 어떤 사람들은 당황하고, 어떤 사람들은 숨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커플끼리 나온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속삭이며 정미와 도현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정미와 도현은 런웨이를 가로지르듯, 그들 사이를 정통으로 가로질러 걸어갔다. 삐삐. 차 잠금장치가 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현이 운전석 차 문을 열었다. 요새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대우 르망이었다. 정미가 조수석의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빨간색 대우 르망이 아파트 주차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재활용 쓰레기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차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봤다. 





토요일 아침은 3단지 주민들이 재활용을 버리는 날이었다. 경비원이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쓰레기를 담는 자루를 정리하고 있었다. 


“선생님, 저기 나와있는 책상이요. 누가 버린 것 같은데. 저희가 가져가도 되죠?” 


경비원이 고개를 돌렸다. 20대 후반 정도의,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남녀가 경비원을 보고 웃고 있었다.


“아…. 저거? 지난주에 누가 가져가더니 또 나와있네? 아 뭐 가져가요. 버린 거니까.” 


두 남녀는 복권에라도 당첨된 것처럼 신이 나서 마호가니 테이블로 갔다. 테이블을 여기저기 훑어보던 남녀가 테이블 아래 달린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들어있었다. 커다란 은제 링 귀걸이. 태양 모양의 커다란 은색 메달이 달린 긴 목걸이. 그리고 사진 한 장. 등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고풍으로 잔뜩 꾸며 입은 남녀가 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남녀는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등산이 아니라 장례식에라도 간 것처럼. 사진 속 남녀를 찬찬히 살피던 여자가 사진을 뒤집어봤다. 무언가 쓰여 있었다.


‘존과 마틸다, 마지막 봄, 속리산에서.’ 


“이거 좀 봐봐. 좀...” 


여자가 남자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남자가 사진을 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여자에게 돌려주었다. 남자가 서랍 속에서 손목시계를 꺼냈다. 누군가 알루미늄 캔을 집어던지는 소리에 남자가 흠칫 놀라 어깨를 하늘 높이 으쓱였다. 남자가 시계를 여자에게 내밀며 은밀한 눈빛을 보냈다. 여자가 시계를 봤다. 롤렉스 시계였다. 딱 봐도 값이 꽤 나갈 것 같은 물건이었다. 여자가 놀란 눈빛으로 남자를 봤다. 남자가 아파트 현관문 쪽으로 고개를 까딱이고는 잡동사니가 든 서랍을 재빨리 닫았다. 남자와 여자가 테이블 한쪽씩 들어 올렸다. 엄청난 무게의 둘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지만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영차영차, 테이블을 아파트 건물 쪽으로 이동시켰다. 여자가 힘이 들었는지 테이블을 잠시 내려놓았다. 남자도 내려놓았다. 둘은 서로를 보며 은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둘이 다시 동시에 테이블을 들어 올렸다. 


꽃이 피기 시작하는 초봄의, 토요일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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