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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작 Dec 08. 2015

이어폰 너머의 감정들

휴대폰 다음으로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은 무엇일까. 당신의 주머니에 이미 지갑이 들어있다면 이 질문에 답은 아마 이어폰일 수도 있다. 일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집을 나서 돌아올 때까지 내 귀에는 늘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훌륭한 DJ가 아니라 음악 어플에서 추천하는 주간 차트 곡을 반복해서 듣곤 했다. 월 정액권을 신청하니 어플은 내게 하루에도 수백 개의 음악을 쏟아내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늘 새로운 곡을 들을 수 있었다.



취미라고 하기엔 어색할 정도로 음악 듣기는 일상에 스며든 습관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깜빡하고 이어폰을 집에 두고 나온 날이었다. 다시 집에 들어가서 가지고 나올까 생각하다 시간을 보니 약간만 망설여도 지각할 정도여서 서둘러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의 사람들 모두는 휴대폰과 이어폰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무척이나 공허했다. 창 너머로 아름다운 강물도 제 빛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하철 안의 소음도 신경이 쓰였다. '이렇게 시끄러웠었나?'


퇴근길도 역시나 공허했다. 생각나는 노래를 중얼거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나는 것은 약간의 멜로디와 전주 부분의 두 소절 정도. 왜 일까? 어릴 적 아버지가 알려주신 노래를 금세 외워 따라 불렀던 내가 지금 듣고 싶은 곡 하나 생각나지 않다니? 매일 그 수많은 곡들이 내 귀에서 웅웅 거렸었는데 왜 하나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침에 일어나 잠이 들 때까지 나는 음악에 감정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정말 무섭게도 음악 없이는 감정을 제대로 움직이는 법을 모르는 기계가 된 것도 같았다. 마음의 액정에는 음악이 흘러들어오지 않는 이 세상을 공허함이라고 표시했다. 그것뿐이었다. 아름다운 강물의 빛도, 지하철 안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또 휴대폰과 이어폰을 가진 후부터 나는 공테이프에 노래를 녹음하거나 가사를 노트에 받아 적은 적이 없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전혀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음악이라는 것은 조금의 돈만 지불하면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요새는 모든 예술 영역 작품들이 그러하다. 생산자는 어렵게 만들어내고 소비자는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현명한 소비자는- 생산자의 노고를 함께 소비한다. 그러나 음악 영역에 있어서 나는 그렇지 않고 있었다. 그저 주는 대로 받아먹고 맘에 들지 않으면 뱉어버렸다. 그러니 그 어떤 예술가의 음악도 내게 남아 있으려 하지 않았다.



디지털기기에 힘을 빌려 음악에 심하게 감정을 의지하고 음악을 제대로 취하지도 못하는 상황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음악 어플을 조용히 해지하고 출근길 녹음해놓은 노래를 한 곡만 들었다. 퇴근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이어폰이 끼워져 있지 않은 내 자유로운 귀는 신기하게도 공허하기보다는 새롭게 느껴졌다. 그 안에는 새의 울음소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바람 소리,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가 들려왔다. 지하철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안부를 나누는 아주머니들의 정겨운 목소리, 친근한 안내원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소리의 여백 속에 나는 창 너머로 아름다운 강물의 빛을. 제대로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충분히 이 자체로도 벅찼다.


휴대폰과 이어폰 없이도 이렇게 벅차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잊고 지냈던, 애정 했던 아날로그의 세계로 초대된 것만 같았다.





글. 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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