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것의 제주인문이야기 II 가슴 아픈 제주 유배

그 아련함과 살아감 finale, 유배인들이 제주에 끼친 영향

by Architect Y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호.

연북정.

제주에 사는 백성들의 북쪽의 한양을 바라보며 임금님을 사모하는 정을 기리는 정자.

연북정 부근 마을안길에는 마을의 공적을 남긴 사람과 덕망있는 사람들의 뜻을 기리는 비석거리가 있다.

타의로 제주로 유배온 사람들.


유배형은 종신형이라 이곳 제주에서 최후를 맞아야했다.

그러나 정국이 급변하던 그 시기의 변화가 생기면 그들 역시 다시 복권되어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기도 했기에 그들은 좌절 속에서도 항상 기대를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해배의 날만 기다리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유배인들은 정치범이면서 학자인 학자관료들이었기 때문에 유배기간 동안 할 수 있었던 일은 독서나 책을 쓰는 일, 후학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제주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양의 이름 있는 정치가나 학자에게 자신의 자녀들의 교육을 부탁하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기도 하고, 학문과 사상을 전수받기도 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유배기간동안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는 교육과 계몽활동을 통해서 죄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교육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인물도 있고,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제주도의 자연환경이나 생활에 관련한 저서를 남겼다.


김정의 문집인 冲庵集충암집 권4에 수록된 「濟州風土錄제주풍토록」은 1519년 기묘사화로 진도에서 제주도로 이배되었던 1520년 부터 賜死사사되던 1521년까지의 생생한 체험기록이다.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16세기 제주지역의 풍토와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 제주풍토지로 다른 기행문에서는 볼 수 없는 문장의 비장함을 맛볼 수 있어,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수필로 평가된다.

김상헌의 「南槎錄남사록」 은 일종의 일기체 형태로 서술된 책으로, 金尙憲김상헌(1570~165)이 1601년(선조 34)에 안무어사로 제주에 파견되어 기록한 일종의 기행문이다.

이는 당시 제주도의 전체적인 사회상을 밝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효종 4년(1653)에 쓰여진 탐라지보다 50여 년이 앞선 제주도의 전반적인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정온의 「東溪集동계집」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당시 권력 투쟁 및 당쟁, 호란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北軒集북헌집」은 김춘택(金春澤)의 시문집으로 불우한 일생을 마친 귀재의 시문으로 시각이 날카롭고 정의감에 차 있는 직필이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상 이해에 좋은 자료가 된다.

이들 중 가장 잘 알려진 「阮堂全集완당전집」은 김정희(金正喜)의 시문집으로 금석학(金石學)·서학(書學) 등의 예술 및 역사 방면에 있어 우리의 문화적 우수성을 찾으려는 민족적 주체성을 자각하도록 하였다.

김윤식의 「續陰晴史속음청사」는 제주적거 부분에서 당시의 국내외 정세, 제주도 유배인의 생활, 부패한 관료의 행태, 과다한 부세, 제주도의 농업과 어업, 제주의 풍속과 인심, 그리고 김윤식과 교류했던 제주인 등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김윤식이 유배 와 있는 동안 제주도에서 일어난 방성칠의 난, 이재수의 난에 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고 사생활을 기록한 일기이기는 하지만 시대 상황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 객관적인 판단력과 기술 태도는 이 문헌의 사료적 가치를 높여준다.

이 밖에 그들은 왕조이나 그 당시 상류 사회의 사람들의 언어와 행동, 일상생활을 통해서 의식주의 개선이나 언어와 예절, 습속 등을 유교식으로 순화시키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유배인 대부분이 비판적인 양반계층이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저항정신을 자각하게했을 것이다.

이는 수탈과 박해의 역사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을 지켜왔던 제주 사람들에게 내재되어있던 반골의 기질이 발현되는 계기도 만들었다.


역사에 등장하는 수차례의 제주민란을 살펴보면 그 이면에 유배인 본인이나 혹은 유배인 후속들과 관련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 가장 혹독한 유배지였던 대정지역이 민란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유배인들이 제주도로 몰려오면서 이런 긍정적인 면만 있던 것은 아니다.

현지인들을 경제적으로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된 것.


조선시대에는 죄인이 유배지에 보내지면 유배지의 백석들이 그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줘야만 했기 때문이다.

실제 제주 3읍에 유배인들이 많이 몰리자 도적이 성행하고 그로 인해 말을 기르기가 힘들 정도라며 죄인들을 육지로 보내달라고 상소하는 내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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