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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hitect Y Sep 01. 2018

Local food II 수원 갈비

; 갈비구이의 시작,  우시장에서 시작된 큼직한 소갈비

수원 화성과 함께 수원을 대표하는 것이 수원갈비다.

매년 시월이면 만석공원과 종합운동장, 어느때는 북문주변과 남문가기전 행궁주변을을 번갈아가며 소갈비 굽는냄새가 진동을 한다.

월드컵을 개최하는 도시로 2002년을 지나며 수원갈비는 전국적으로 더욱 유명해 졌다.

영원한 외식의 로망, 소갈비

한우 생고기를 불판에 올리기전에는 유일무이한 최고의 외식 메뉴였다.

그런데 소갈비도 가족 외식의 주요 메뉴로 떠오른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길게 잡아 40년.

우리는 주로 소갈비는 찜이나 탕으로 먹어왔다.

雅言覺非 아언각비

정약용은 雅言覺非아언각비(잘못 쓰이고 있는 말과글을 검토하여 뜻과 어원을 밝히고, 용례를 들어 합리적으로 설명한 책)에서 牛脅우협(소의 겨드랑이)을 갈비曷非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러나 19세기 말~1920년대 초반에 나온 한글 요리 책에서는 갈비라 하지 않고 가리라고 적었다. 

19세기말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조리서인 是議全書시의전서, 飮食方文음식방문에서는 가리구이라는 음식 이름이 보인다. 


가리를 두치 삼사푼 길이씩 잘라서 정히 빨아 

가로결로 매우 잘게 안팎을 어히고(자르고) 세로도 어히고 가운데를 타(갈라) 

좌우로 젖히고 가진(갖은) 양념하여 새우젓국에 함담(간) 맞추어 주물러 재여 구어라.

是議全書시의전서, 飮食方文음식방문

1924년에 출판된 이용기의 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서는 갈비구의(구의는 구이의 다른 표기)라고 적은 다음에 가리쟁임과 脅炙협적이라는 다른 명칭을 붙였다. 

가리쟁임은 가리를 양념하여 재여 두었다가 굽기 때문에 붙인 이름인 듯하다.

그 조리법을 한 번 살펴보면


기름진 연한 갈비나 암소갈 비를 잘게 족이되 

대가리는 질기니 내어놓고 한치 길이씩 잘라서 물에 잠깐 씻어 베수건에 꼭 짜서 안팎을 잘게 어이되 붙은 고기를 발라가며 

다 어인 후에 진장에 꿀과 배즙과 이긴흔 파와 마늘 다져 넣고 깨소금과 호초가루를 넣어 한데 풀어 가지고 

어인 갈비를 하나씩 들고 고명 풀어논것을 안팎으로 발으되 짜지 않게 하여 담되 

다시 켜켜로 깨소금과 기름을 쳐가며 재여 놓았다가 구어 먹나니 

......중략...... 

대체 잘 쟁인 가리를 석쇠에 굽지 말고 번철에 기름을 붓고 바삭 지져 먹는 것이 좋으나 그러나 굽는 것은 기름기가 송알송알 하여 맛이 더 있는 것 같으니라.


그런데 이용기는 갈비구이를 먹는 모습을 두고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대체 가리구의와 상치쌈이라 하는것은 습관으로 좋아서 편기를 하나 그러하나 이것을 안 먹는 사람이 보게 되면 오즉 추하게 보며 오즉 웃겠으리요. 

그 뜨거운 뼈 조각을 좌우 손에 다가 흉켜 쥐고 먹는 것은 사람이 먹는 것 같지 않고......

이런 내용은 갈비구이를 선술집의 안주로 낮추고, 그 대신에 요리옥에서는 갈비찜을 내세우도록 만들었다.


조풍연은 서울잡학사전에서 1939년에 서울 낙원동에 갈비집이 있었다고 했다. 

그 집에서는 냉면과 함께 가리구이를 팔았다.

당시 저녁 늦은시간에 극장이나 요리옥·카페·바 등이 끝나면 술 깨는데 냉면이 좋다고 하여 갈비집에 손님이 몰려들었다.

손님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냉면과 함께 갈비 두대를 시켰다. 

왠지 가리구이 달라고 하면 복잡하였고, 간단히 줄여서 갈비두대라고 했다. 

이로부터 갈비하면 가리구이가 되어 버렸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갈비구이는 선술집에서 술안주로 먹는 음식이었다. 

그 값도 보통 한대에 얼마 혹은 두대 에 얼마 이런 식이었다. 

1930년 12월7일자 동아일보에서는 강릉의 식당요리가격을 기사로 다루었다. 

국밥 한 그릇에 15전인데 비해 갈비 한 대는 5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과 비교하면 갈비구이 한대 값이 설렁탕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결국 1920년대 이후 갈비 구이는 선술집의 술안주에 지나지 않았고, 갈비찜은 요리옥에서 신선로 다음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고급음식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외국 사절을 접대하는 연회에서나 요정에서나 명절 가정 요리로 갈비구이보다는 갈비찜이 인기를 누렸다. 

고도의 경제발전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가장 먹고 싶은 쇠고기에 대한 욕구를 증대시켰다. 

이러자 갈비찜과 함께 갈비구이가 고급음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1972년 외국에서 쇠고기를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한우갈비구이는 더 이상 술안주가 아니었다. 

본래 수원갈비도 간단한 술안주에서 시작했다. 

1940년대 수원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화춘제과라는 일본식 제과점을 운영했던 이귀성씨는 광복 후 1945년 11월 쯤 수원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간판을 바뀌달고 米廛屋미전옥이라는 해장국집을 열고 해장국에 갈비를 넣어주어 인기를 모았다.(갈비우거지탕) 

이후 1946년 화성 華西門화서문의 華화자를, 이씨의 형이자 현재 3대사장 광문씨의 큰할아버지인 이춘명씨의 春춘자를 따서 華春屋 화춘옥으로 이름을 변경한다.

식당 한쪽에 화덕을 만들고 여기에 길이 17cm 남짓의 커다란 쇠갈비를 구워 양재기에 담아 냈다. 

손님들은 목로주점의 그것 같은 기다란 나무탁자에 앉아 종이로 쇠갈비뼈 양쪽을 잡고 갈비를 뜯었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귀성씨는 1956년, 갈비에 양념을하여 숯불에 구워내는 갈비구이를 메뉴에 보탰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까지도 갈비구이는 화춘옥의 주된 메뉴가 아니었다. 

갈비구이와 함께 해장국·갈비탕·설렁탕·냉면 등을 여전히 판매 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겨우 3년이 지난 시점이라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시대였다. 

그래 당시 쇠갈비구이를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란 부자이거나 고급 공무원, 장군 정도는 돼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원보다는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와서 먹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맛이 좋다는 소문이 나자 벼 품종을 개량하는데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던 박정희전대통령도 수원의 농촌진흥청을 방문하면서 화춘옥의 단골이 되었다. 

박 전 대통령이 오면 숯불 연기를 피워 다른 손님들의 눈길을 피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장사 잘되는 식당 옆에는 반드시 같은 음식을 내는 집이 생기게 마련이다. 

0여 년 만에 싸전거리에는 화춘옥을 중심으로 20여 곳의 쇠갈비집이 밀집하게되어 팔달로 근처는 갈비집 촌으로 변해갔다. 

이것이 오늘날 수원갈비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재개발이 되면서 모두 도시 전체로 흩어졌다. 이즈음 화춘옥은 무슨 까닭에선지 문을 닫았다.

이후 화춘옥의 명성은 이어졌는데, 화춘옥에서 주방일 했다는 사람, 지배인 했다는 사람 등이 식당을 차려 스스로 화춘옥 갈비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수원 토박이들이 꼽는 화춘옥 후계자는 1980년대에 문을 연 화청갈비, 삼부자집, 본수원갈비 등이다. 

이 무렵 서울에도 유명 소갈비집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업계 종사자들에 따르면 서울의 소갈비집 주방장들은 대부분 수원 갈비집 출신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소갈비집 역사의 큰 줄기는 화춘옥에서부터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포천 이동갈비는 80년대 초에 시작된 음식으로 수원갈비와 달리 조각갈비다. 보통의 갈비 요리에서는 한 대인 것을 갈비뼈를 세로로 잘라 두 대로 만들었고 이 조각갈비 10대를 1인분으로 계산해 이동갈비가 싸고 푸짐한 갈비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고기를 굽는 방식은 열의 이동에 따라 크게 대류, 전도, 복사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대류는 열원에서 나오는 뜨거운 공기에 고기를 익히는 것을 말한다. 

전도란 구이판에 올려 굽는 것이고, 복사는 열원에서 방사되는 열이나 전자파로 고기를 익히는 방식이다. 

세 방식 중 대류와 복사는 불의 종류에 따라 어느 방식이 주가 되고 보조가 되기도 하는데, 대체로 가스는 대류, 숯이나 연탄은 복사 방식으로 굽는다.


가장 흔한 방식이 구이판을 이용한 전도이고 다음으로 복사, 대류 순이다. 

직화로 구울 때 가스불보다 숯불로 굽는 고기가 더 맛있는데 숯불은 열과 원적외선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순식간에 고기의 속까지 익혀주기 때문에 육즙을 온전히 가둔다. 

이에비해 가스불은 복사가 매우 적기 때문에 고기를 일시에 익히지 못해 육즙이 빠져나오니 맛이 없는 것이다.


이런 과학적인 설명이 없어도 숯불이 고기 맛을 내는 데 좋다는 것이 널리 퍼지면서 웬만한 고기집에서는 숯불구이를 한다. 

그런데 숯불만 있다고 해서 고기 맛이 나는 게 아니다. 

조그만 화덕에 숯 몇 조각 넣고 구우면 불판보다 못한 결과를 얻게 된다. 

일단 숯불의 양이 많아야 하고 숯불과 고기의 거리를 최단으로 해서 복사열을 강하게 해 순식간에 익혀야 제대로 된 고기 맛을 얻을 수 있다.


갈비구이의 원조 화춘옥은 이런 복사열의 원리를 잘 이용하는 식당이었다. 

좌우 길이 1m가 훨씬 넘는 커다란 화덕에 숯불을 잔뜩 넣고 고기를 구워내는데, 손님 테이블에서는 고기가 식지 않을 정도의 열만 제공했다.

하지만 지금의 수원갈비는 모두 테이블에서 생갈비를 처음부터 굽는다.

당연히 예전의 맛을 느끼기에는 2%부족하다.


화춘옥은 1979년 2대 사장인 이영근씨가 폐업을 하고 공무원이었던 이광문씨가 3대째 가업을 잇기 위해 2000년 중국 북경과 천진에 화춘옥이라는 간판으로 갈비구이집을 열고, 수원 인계동에서 화춘옥을 다시 시작했으나, 2008년 광우병 파동을 겪으면서 다시 폐업하게 되고 이를 다시 2016년 5월 다시 문을 열었다.

폐점과 재 개업을 반복하다보니 그 맛은 잘 모르겠다.


화춘옥이 사라졌던 1980,90년대 수원갈비를 주도 했던 갈비구이집은 위에서 언급한 삼부자집이다.

삼부자 갈비는 현 김재홍 사장의 모친인 김정애씨가 1970년대 중순 팔달문에서 운영하던 갈비센타가 그 전신이다.

김 여사는 1980년대 들어 갈비센타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폐업하기 전의 화춘옥을 잠시 임대받아 운영하다가 1981년 동수원 지역으로 자리를 옮겨 원두막 갈비(지금의 삼부자 갈비)의 문을 열었다.

당시 동수원 지역에 최초로 문 연 원두막 갈비 주변에는 논밭과 버스가 다니는 1차로 도로가 전부일 정도로 황량해 주위의 만류가 많았다고 한다.

삼부자갈비는 생갈비를 냉동과 해동을 두세차례 반복한 최고 육질의 갈비를 숯불에 구워내 꼬들꼬들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을 낸다. 

여기에 갈비뼈로 우려낸 구수한 된장찌개와 즉석에서 무친 게장, 칼칼한 맛의 백김치가 나온다. 

식혜와 번갈아 나오는 노란 빛깔의 황도는 이곳만의 별미다.

삼부자 갈비의 성공에 이어 동수원 지역에는 동수원모텔, 본수원 갈비, 본집 갈비, 신라 갈비 등 갈빗집들이 다수 들어섰다.

본수원갈비의 생갈비는 10~11㎝ 정도 크기의 갈비를 잘라 숯불에 구워 겨자를 풀은 간장소스에 약간 묻혀 먹으면 입안이 고소한 향기로 가득차게 된다. 

양념갈비는 소금으로 버무려 담백하며 양 또한 넉넉하다. 

특히 집에서 직접 담근 된장으로 갈빗대와 함께 우려낸 된장찌개는 일품이다. 

그 다음의 바통을 이어 받은곳이 가보정이다.

지금은 타지분들이 방문했을때 위에서 언급한 곳보다 가보정을 먼저 방문한다.

1992년 생긴 가보정의 경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만 모두 3곳의 식당을 1천450석 규모로 운영한다.

가보정이 두각을 드러낸것은 수원 갈비축제 덕분이다.

1995년 시작된 수원양념갈비축제는 근래 들어 가을에 개최되는 수원화성문화제 기간에 함께 펼쳐진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덕분이다.

정조가 화성을 축성하고 난 뒤 수원을 자립기반의 도시로 육성하기 위해 屯田둔전을 경영했다. 

그 둔전에서 농사를 잘 짓도록 농민들에게 종자와 소를 나눠줬다. 

이후 점차 늘어난 소는 수원의 대표상품으로 팔리기 시작했고, 그 우시장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일제 강점기에 전국 최대의 우시장이었던 수원.

우시장 덕분에 관련 음식이 탄생해 식객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화춘옥 방식의 수원갈비는 1985년 4월 수원시 향토음식으로 공식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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