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문학입니다. 그 중에서도 19세기 러시아문학과 도스토옙스키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또렷하게 좋아하는 장르와 작가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문학을 가장 좋아하지만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떤 분야의 책을 읽고 싶은지 늘 모호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과는 전혀 다른 책을 만나 실패도 많이 하고 지난함도 느끼며 책읽기를 번복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좋아하는 문학 장르를 또렷하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시행착오 가운데 나름대로 체득한 방법 때문이었습니다.
# 책 파도타기
저는 그 방법을 ‘책 파도타기’라고 부릅니다. 어떤 책을 읽다 다른 책에 대한 언급이 나오면 그 책을 직접 찾아서 읽어봅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읽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본격적으로 ‘책 파도타기’라 불렸던 책은 기억이 납니다. 2002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였습니다. 풍부한 묘사에 취해 순식간에 읽었으면서도 정작 줄거리는 희미했는데 그 작품 속에서 언급 되었던 두 권의 책은 기억하고 있습니다.『마의 산』과 『위대한 개츠비』였습니다. 곧바로 두 작품을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하지만 두 작품을 읽어내는 게 녹록치 않았습니다. 『마의 산』은 읽는 데만 두 달이 걸렸고 『위대한 개츠비』를 『상실의 시대』속 인물은 세 번이나 읽어야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의 산』은 재독하기 위해 다른 출판사 책으로 구입해 놓았습니다. 최근에는『위대한 개츠비』를 재독했는데 결국 『상실의 시대』속 인물처럼 세 번을 읽어야 좀 더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 꼭 재독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시작 된 '책 파도타기'로 만난 좋았던 책들을 좀 더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책 파도타기'를 실행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알지 못했을, 그런 책들이어서 저에겐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책들입니다.
*도스토옙스키를 너무 좋아해서 양장 한 질, 무선으로 한 질을 모았습니다.
제가 이 책들을 모을 때 절판중이어서 힘들게 모았던 기억이 납니다.
# 도스토옙스키 vs 뿌쉬낀 vs 러시아문학
책 파도타기에서 가장 큰 수확은 도스토옙스키로 알게 된 러시아 문학이었습니다. 저자의 책에 나오는 책들을 찾아서 읽다보니 자연스레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읽게 되었고, 가장 좋아하는 장르가 되었습니다. 제가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구매할 당시 18권이었는데 전작까지는『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만 남아 있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뿌쉬낀 작품을 인용하는 것은 물론 찬양하고 있어서 읽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한 권으로 된 전집을 어렵게 구해서 일 년 만에 완독을 했는데 읽는 기간은 지난했지만 읽고 얻는 것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뿌쉬낀에 대한 감탄을 비롯해서 다른 러시아 작가를 알게 된 것이 가장 기뻤습니다. 뿌쉬낀은 러시아의 대문호이지만 시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넘나드는 장르는 너무 다양하고 완벽해서 감탄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두 작가로 인해 고골, 막심 고리끼, 체호프 등을 알아갔고 그들의 작품까지 탐독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문학의 두 거장으로 인해 러시아 문학에 완전히 빠져버린 것입니다.
# 지구 끝의 사람들 vs 모비 딕
또한 비슷한 배경이 되는 작품을 읽다보면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연히 루이스 세풀베다의『지구 끝의 사람들』을 읽다 첫 문장에서『모비 딕』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이름은 이스마엘. 앞으로 나를 그렇게 불러주길 바란다. _지구 끝의 사람들
내 이름은 이스마엘이라 부른다. _모비 딕
고래가 등장하는 두 작품을 순차적으로 읽다보니 ‘바다’라는 공통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비교하며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내친김에『해저 2만리』까지 읽고 나자 각기 다른 작품의 매력은 물론이고 기존에 몰랐던 자잘한 상식부터 전문 지식이 쌓여가는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저는 고래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고래에 관한 책만 보면 구입하게 되고, 다큐멘터리에 고래에 관해 나오면 어느 순간이든 멈춰서 보게 되는 습관도 생겼습니다.
# 뉴욕 3부작 vs 월든
또한 폴 오스터의『뉴욕 3부작』을 읽다『월든』도 읽게 되었습니다. 책 속의 주인공이 매일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월든』을 읽고 있어서 직접 구입해서 읽습니다. 그러나 이내 이렇게 재미없고 따분한 책을 왜 읽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이 나옵니다. 재미가 없다는데도 저 역시 구미가 당겼고 그렇게 찾아서 읽은『월든』은 정말 초반이 너무 지루해서 진도가 나가질 않았습니다. 그러다 월든 숲까지는 아니더라도 본가인 시골집에서 가을밤에 마저 읽기 시작했는데 배경이 비슷한 기분 때문인지 술술 읽혔습니다.
#현장독서법
이처럼 독서의 즐거움을 더 만끽하고 싶다면 ‘현장독서법’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김영하 작가의『랄라라 하우스』에서 소개된 ‘현장독서법’은 이렇습니다. 제가 우연히 『월든』을 시골집에서 읽었을 때 잘 읽혔던 것처럼 ‘특정한 책을 골라 그것에 어울릴 만한 장소(대체로 작품의 배경)에 가서 읽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자면, 에밀리 브론테의『폭풍의 언덕』을 읽으러 작품의 배경이 된 영국 요크셔로 가 바람 부는 언덕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설국』은 눈 내리는 일본의 니가타현에서 읽으면 좋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장독서법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슷한 날씨에 맞춰 독서를 해봤습니다. 실제로 폭설이 내리던 밤에『설국』을 읽고 푹푹 찌는 여름밤에 베트남이 배경인『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읽었습니다. 비슷하게나마 작품 속의 배경에 맞춘 독서였는데 의외로 깊은 공감각을 이끌어 낼 수 있어 작품 속으로 침잠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맞는 것은 아닙니다. ‘책 파도타기’를 해도 분야가 전혀 달라 배경지식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책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현장독서법’ 대로 독서를 해도 오히려 맞춤한 배경 때문에 집중이 덜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책은 어떤 분야인지, 어떤 작가에 관심이 있는지, 하다못해 어떤 표지에 이끌려 책장을 펼치게 되는지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작가라도 나에겐 아무런 감동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추천하는 방법은 참고가 될 수 있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그 독서법이 나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먼저는 시도를 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만난 책들이 늘 기대 이상의 만족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마치 좁은 터널 속 같은 답답한 독서를 하다 광활한 벌판에서 여유로운 독서를 하듯 새로운 경험과 함께 저의 독서가 한 단계 성장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독서를 하다 보니 현대보단 고전소설을, 응축된 문장보다 세세한 묘사가 들어간 문장을, 미술과 철학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점차 저만의 관심분야가 형성되어 갔습니다.
책 파도타기를 비롯해 연관된 책읽기, 현장독서법은 현재진행중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한 권의 책을 읽기 시작할 때면 설렙니다. 그 안에서 어떤 세계와 곁가지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런 설렘을 안고 책장을 기웃거리며 읽을 책을 찾는 일상이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