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동네에서 건져 올린 평지의 감각
국민학교 시절 봄 소풍날입니다.
거대한 산 중턱을 깎아 억지로 만들어낸 도로와 집들, 그리고 학교.
그렇게 만들어진 가파른 동네에서 저는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에서 시내를 가려면 한참을 내려가야 했고, 학교로 향하는 길은 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오르막이었습니다.
이렇게 기울어진 동네에서 살면서, 저는 끝없이 펼쳐진 평지에서의 삶은 어떨까 하는 동경과 상상을 꽤 오랫동안 품어왔습니다.
소풍은 학교보다 위에 위치한 산 정상이 목적지였습니다.
학교 위에 자리한 대학교를 지나면 얼마 가지 않아 산 정상이 나옵니다.
소풍 때가 아니어도 친구들과 종종 갔었던 장소이기에 제게는 무척 친근한 곳입니다.
그곳이 좋았던 이유는, 비록 넓지는 않았지만 귀한 평지였기 때문입니다.
바닥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고, 저 멀리로는 푸른 바다가 보였습니다.
봄 소풍날의 그 장소는 유난히 따스했고 아름다웠습니다.
산 정상답게 키 작은 나무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었고, 상쾌한 공기는 어린 저의 머릿속에 평생 간직해야 할 기억으로 각인시켜 줍니다.
지금 그때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그 기억 속에 사람들은 없습니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몇 그루의 키 작은 나무들과 바람에 살랑거리는 잔디, 해와 구름, 그리고 안갯속에 숨어있는 먼바다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강렬한 오렌지 빛으로 물든 평지.
이것은 제 기억이 저에게 주는 치유의 선물입니다.
그 오렌지 빛 평지는 어쩌면 제 무의식이 설계해 둔 가장 오래된 안전장치일지도 모릅니다.
삶이 가파른 오르막처럼 느껴질 때, 혹은 내가 서 있는 지면이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다고 느낄 때마다 제 기억은 어김없이 그날의 평지를 배달해 줍니다.
어린 시절 저는 환경에 의존하고 적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산을 깎아 만든 동네의 경사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고, 학교와 집 사이의 고단한 물리적 거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산 정상의 평지를 만난 순간, 세상이 아무리 가파를지라도, 반드시 어디엔가 숨어있는 평온의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외부의 지형에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합니다.
현실이 비탈길이라면, 잠시 눈을 감고 제 기억이 배달해 준 그 평지에 접속합니다.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그 고요한 정상에서, 강렬한 오렌지 빛 햇살을 다시 느끼며 숨을 가다듬어 봅니다.
기울어진 세상 속에서 평지를 꿈꾸던 소년은 이제 어른이 되어, 스스로 평지를 만드는 법을 배웁니다.
제가 만들어가는 평지에서 산정상의 평지를 생각하며 저는 어떤 경사로 위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