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았달까
- 이것이 의식의 흐름으로 쓰는 감상.
문득,
적절한 단어다, 불현듯이라고 해도 좋겠다.
문득, 나는 우습다.
무엇이 우습기도 하고 내가 우습기도 하다.
적절한 문장이다, 불현듯이라고 해도 좋겠다.
우스움은 문득, 불현듯 찾아왔다 떠났다.
지금은 조금도 우습지 않다.
지나치게 진지할까 두려울만큼, 집요하게 진지하다.
최악의 시기, 비관적인 이에게는 모든 순간이 최악이 된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그런 사람에게 “긍적적으로 생각하시오.”라는 조언은, 그게 조언처럼 보이는 위협, 협박이라면 더욱, 커다란 절망이 된다.
‘나를 내버려 둬요!’
그럴수록 세상은 거리를 좁혀온다.
내가 누군가의 문학, 소설을 비판하듯
누군가는 나의 삶을 비판하게 될 거다.
세상을 살며 얼마간의 족적을 남긴 이는 누구라도 그 단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테니 겸허히 감내해야겠지. 그러나 억울함은 어쩔 수가 없다.
‘내가 뭘 잘못했는가?’
‘세상이 나를 몰아세워 견딜 수 없게 만들었건만!’
“이게 다 당신을 위하는 일이였어.”
그 담담한 진실에 숨이 죄인다.
시대의 소음이 극에 달할 때, 아이러니가 내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지켜낼 것이다.
소음에 묻혀 내가 지워지고 난 뒤에야 그 일은 실현된다.
아이러니, 아이러니다.
돌아본다.
왜 시대가 아니라, 시대를 살아낸 개인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을까.
거기까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시대의 괴로움이 큰가, 개인의 괴로움이 큰가.
시대는 흐르고 변화하며 지속되지만 개인의 삶은 어디에도 남겨지지 않는다.
음악이니 문학이니 하는 소음, 낙서를 남기는 사람들은 ‘인간은 유한하나 음악, 문학은 무한하다’고 믿고 싶어한다.
허망하게도 문학은 쓴 이의 마음으로 읽히지 않으며, 음악은 만든 이의 심정으로 연주되지도, 들리지도 않을텐데.
견디는 게 가장 쉬워 견디는 삶.
모두 무너지고 부서져서 더는 버틸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못하는 비참함.
안녕 하면서 안녕 하는 문장과 단어와 생각 사이사이.
나는 조금 슬퍼한다.
그리고 단지 그뿐.
사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