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과 삶의 자발성
소설의 효용은 읽는 이에 따라 다르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읽은 사람이 같아도 읽은 때, 상황, 떠올린 생각, 나아간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 깨달음, 느낌, 인상으로 남는 게 소설이다. 정답이 없다기보다 무수한 정답을 품고 있는 이야기들.
추리나 스릴러 소설처럼 기승전결을 통해 사건의 진실 혹은 범인을 찾아가는 즐거움을 핵심으로 하는 소설은 문제로 분류하면 객관식 유형에 가깝다. 복잡한 이야기가 한 순간 명료하고 단순한 결론, 진실에 닿는 순간에 쾌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거다.
객관식 문제가 그런 것처럼 한계는 명확하다. 정답이 있는 거다. 하지만 흔히 순문학으로 분류하는 소설은 주관식이라고 볼 수 있다. 좋게 이야기하면 다양한 결론,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지만 나쁘게는 "그래서 뭐? 하고 싶은 말이 뭐야?"하는 답답함도 남기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그 답답함을 옹호하고 보통은 즐기는 편이다. 길고, 결론이 없는 소설. 결말이 있고 결론이 있겠지만 감동을 느끼거나 무감히 시큰둥해도 무관한 방관에 가까운 무심함만 남기는 작품에도 분노하지 않는다. 그런 게 우리 삶에 가장 가까운 모습, 삶이 담긴 소설의 특징이라 여기므로.
<모스크바의 신사>는 러시아 혁명 이후의 이야기다. 학창시절 지은 한 편의 시가 빌미가 되어 재판을 받게된 젊은 백작은 종신 연금형을 선고 받는다. 보통 연금이라 하면 집에 갇히기 마련인데 이 백작의 경우는 좀 특이하게 호텔이다. 일단 목숨을 건진 건 분명한데 이 형벌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확신하기 어렵다. 호텔 밖에만 나가지 읺는다면 호텔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으며 특별히 어떤 행동을 제재당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형벌임이 분명한 건 이 백작이 세계 곳곳을 다니던 활달한 인물이며, 신사로서의 품위를 무척 중시하고, 자신을 찾아올 가족이나 깊은 유대를 나눌 친구가 없는 데다 갇힌 곳이 러시아의 중심 모스크바 번화가의 호텔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모르고는 살 수 있어도, 자유로웠던 존재가 어떤 곳에 갇힌 삶을 견디기는 쉽지 않다. 야생의 새가 새장에 갇혔을 때 태반이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것처럼.
백작은 수십 년이나 호텔에 갇혀 산다. 그러나 사람은 살아있는 한 누군가를 만나기 마련이고, 그들과의 인연이 삶을 지탱하여 살아가게 하는 법. 백작 역시 그렇게 삶을 이어간다.
몇 편의 소설이 얼른 떠올랐는데 유사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이 첫번째였고, 조금 다르지만 느낌이 닮았던 <리스본 행 야간 열차>와 뇌리를 스쳐간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 러시아 이름이 떠올리게 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까지.
러시아 백작의 이름이 조금 복잡하지만 작가가 센스를 발휘한 덕에 인물들의 이름으로 어지러워지는 일은 없었다. 안 그랬다면 읽기가 조금은 어려워졌을지도.
700페이지, 긴 소설이다. 하지만 모든 삶이 하루에 하루를 더한 시간의 총합인 것처럼 한 페이지, 한 줄이 더해진 이야기일뿐이니 부담은 내려놓을 것.
명예로운 귀족, 예절에 철저한 신사, 아이 앞에서 약해지는 어른, 기른 아빠로서의 사랑.
어떤 장면에서 웃고, 어떤 장면에서 뭉클해지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을 가져도 좋겠다.
기억할 것: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환경에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 삶은 어느 곳에서든 계속되어야 하므로, 최선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