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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Feb 26. 2024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역사가 무슨 소용인가

존재와 가치는 저마다 다른 기준으로 평가되기 마련이다

 아직 공기가 차지만 맑고 밝은 2월 말이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곳곳에 태극기가 걸린다. 3. 1절을 기념하는 태극기다. 지난해에는 걸리지 않았지만 감영길 포정사 문루에는 대형 태극기가 걸리고, 독립운동을 재현하는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다. 1919년 2월 말, 이맘때의 공기는 지금과 비슷했을지 몰라도 분위기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일제의 통치와 억압을 견디지 않으려는 이겨내려는 이들이 서로 뜻과 힘을 모으느라 온 힘을 기울이며 봄이 오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누군가는 꽃 피는 봄에는 독립을 되찾는 희망을 품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꺾일 줄 알면서 차라리 부서지는 게 낫다는 마음으로 각오를 다졌을 것이다. 그런 봄이라 유난히 공기는 차가웠을 거고 하늘도 시릴 만큼 푸르렀는지 모른다.

  지난해 감영길 포정사 문루에 대형 태극기가 걸리지 않은 것과 독립운동을 재현하는 공연이 없던 것을 두고 이런저런 추측이 난무하기도 했다. 정권의 변화, 대일 정세와 태도의 전환, 지자체장이 바뀐 사정들이 두루 오르내렸다. 올해는 어떨까 자연스러운 궁금함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지난해와 크게 다를 이유는 없어서 금세 관심이 시든다.


공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누가 있을까.


분명 국사 시간에 배웠을 텐데 좀처럼 기억나는 이름이 없다. 다만 공주에 살면서 알게 된 의외의 이름이 하나 있는데 바로 유관순 열사다. 유관순 열사는 천안 출신으로 아우내 장터에서 3. 1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사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무지와 무관심의 결과지만 공주에 와서 보니 왜 모를 수밖에 없었는지 납득하게 되는 부분들이 있다. 

 1902년 공주 지역에 최초의 예배당을 열고 지금은 영명 중고등학교로 바뀐 중흥 학교와 명선여 학당을 설립하고, 서양식 의료를 제공하며, 우유 등을 보급해 영아 사망률을 낮추는 등의 기여를 한 것이 감리교 선교사들이었다. 공주에서의 삶을 기록하면서 왜 뜬금없이 감리교회와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적는가 할 수도 있는데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공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르고 그들의 이야기가 이곳에서 살기로 결정하는데 작은 기여를 했기에 기록에서 뺄 수 없는 마음임을 덧붙인다.


  현재 공주제일교회의 구 예배당은 기독교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코로나 시기에 출입이 통제됐지만 지금은 관람도 가능하고 행사도 자주 열려 기회가 닿는다면 들어가 볼 수 있다. 기독교 박물관은 1931년 지어졌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반파됐던 걸 복원한 게 지금 모습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지처럼 순례를 다녀가기도 하는 이곳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다. 유서 깊고 멀쩡한 건물을 왜 부수겠는가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부수는 데는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필요하면 이유는 만들 수 있고 역사적 가치와 무관하게 건물은 사라지는 것이다.


  중흥 학교로 설립되어 영명 학교로 이름을 바꾼 영명 남학교 건물의 운명이 그랬다. 영명 여학교 교사는 먼저 헐리고 남학교 교사는 남아있었다고 한다. 교사가 낡고 오래되기도 했겠지만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등록문화재 신청을 했다고 한다. 그때 제일교회 구 예배당도 함께 신청을 했지만 약간의 점수 미달로 등록에 실패했다고. 문제는 등록에 실패한 이후 영명 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탑을 세우는 계획과 함께 불거졌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의 가치가 없는 건물이므로 헐고 그 자리에 100주년 기념탑을 세우자는 의견이 힘을 얻는 계기가 된 것이다. 사립학교에서 추진하는 내용이라 지자체에서 간섭할 수는 없었겠지만 등록문화재 등재에 실패한 건 명백히 행정적 실수가 아니었나 싶다. 결국 남학교 건물이 헐렸는데 학교 지붕을 포클레인이 부수던 순간에 백두산 소나무로 만든 판자들이 발견되면서 철거를 반대했던 영명 학교 원로들을 탄식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영명 학교 건물이 사라진 이야기가 유관순 열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제 이야기를 해야겠다.


2019년 3. 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열사 관련 공간을 재정비한 공주시와 영명 학교의 노력에 이어 2020년 유관순 열사를 천안에서 공주로 유학시켜 가르친 사애리시 선교사 부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이 수여됐다. 영명 재단 부지 곳곳에 유관순 열사와 관련된 동상과 비석이 있고 앵산 공원이라 불리던 일본인들이 벚꽃 놀이를 즐기던 공원에도 유관순 열사상이 세워지고 독립 활동을 기념하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모든 것이 최근의 일인 것이다.


  유관순 열사는 공주 출신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천안 병천 출신으로 공주와의 인연은 영명 학교에 수학한 2년에 불과하다. 이게 무슨 문제냐고 또 물을 수도 있는데 공주에 사는 외지인들은 좀처럼 공주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대표적 인물이 나태주 시인이다. 사석이나 공석에서 종종 공주가 예쁜 걸 공주 사람만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공주를 사랑하는 나태주 시인은 공주 어른들에게는 여전히 서천 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이 현실이라는 얘기다.


그런 관점에서 고작  2년을 공주에 살며 배웠다고 공주의 인물로 받아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조금 무리한 요구였는지도 모른다.

 방문자와 이주해서 사는 사람들 다수에게 공주의 배타성과 폐쇄성에 관련된 얘기를 들었다. 오히려 내게는 체감이 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들어보면 어떤 의미로 그렇게 느끼는지 알아차리고 공감하게 되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우스개 같지만 "백제 때부터 살아오지 않은 사람은 공주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의 얘기를 들었다는 경험담도 있다. 공주 시내를 철로가 관통하는 걸 용납할 수 없어 KTX공주역이 외곽에 자리하게 됐다는 말도 있다. 백제 후손과 공주 토박이의 자부심과 자랑이 가끔 외지인을 홀대하거나 기회에서 눈 돌리게 하는 일이 있다는 이야기다.

영명학교 유관순 열사 동상들

 학교의 인물일 수는 있어도 공주의 인물은 아닐 수 있는 대표 독립운동가가 바로 유관순 열사인 셈이다.


공주 원도심은 1,500년 백제 고도라지만 가장 오래된 건물이 100년을 겨우 넘겼을 만큼 물리적으로 보존된 유산이 많지 않다. 일제 강점기 감영길 주변에 사는 98%가 일본인이었다고 하는데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적산 가옥도 한 손에 꼽는다. 보존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이슈가 아닌 것이다.


이런 흐름에서 보면 공주 원도심에서 오래된 건물과 골목이 사라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여전히 납득하기는 어려워도 왜 그렇게 쉽게 부수고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가는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낡고 오래된 도시이기에 오히려 새것을 갈망한다. 수백 년이나 불편했으므로 이제라도 편해지고 싶은 마음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1919년 4. 1 공주읍만세운동 기념_독립선언문

 3. 1절을 기다린다. 


3. 1절이 지나고 거리에 태극기가 모두 걷히고 난 후, 지금보다 조금 더 따뜻해지면 아이 손을 잡고 그 흔적을 천천히 거닐어야겠다. 지금은 기다릴 때, 남아있는 역사보다 기억하는 역사가 더 의미 깊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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