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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계절

by 서영수

크리스마스를 앞둔 빵집은 늘 비슷한 풍경이 반복된다. 성탄 케이크를 고르는 손길들로 분주하지만, 계산대 앞의 표정은 사뭇 지쳐 있다. 자주 보던 점원은 고단함을 애써 어색한 미소로 지우며 서둘러 빵을 포장한다. 하루 종일 같은 일을 하며 보냈을 시간이 표정에 그대로 묻어 있다. 줄이 너무 길어 잠시 망설이다가, 어차피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체념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 무료한 시간 동안 깨달은 점은, 누군가는 설레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준비하지만 같은 그 자리에서도 지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이 붙은 날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따뜻한 것은 아니다. 한때 나도 이 계절을 견뎌야 할 시간으로 여긴 적이 있었다. 불빛은 지나치게 밝았고, 연말연시, 성탄절을 축하하는 말들은 과잉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그때만큼 힘들지 않지만, 그 차이가 회복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감각을 덜어낸 결과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빵을 들고 나오니, 건물과 거리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달리 하늘은 흐린 회색빛이다.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잃어버린 시간과 사람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에 대해 말하던 문장.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상실을 축적하며 살아간다. 기억은 쌓이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무너지고, 남은 자리는 설명할 수 없는 공백으로 남는다.


사는 일은 어쩌면 이런 상실과 실망에 무뎌지는 연습인지도 모른다. 너무 또렷이 느끼지 않기 위해, 너무 깊이 붙들리지 않기 위해 감각을 조정하는 연습. 어떤 다짐도 세월 앞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삶을 버텨내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쪽을 택한다.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희망은 때로 헛되다고 되뇌이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시간을 '상실의 시대'라 불렀다. 특정한 비극이 아니라, 누구나 통과해야 하는 흐름으로서의 상실. 나도 그 흐름 속을 걸어왔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없고 어느덧 그때의 감정은 흐릿해졌지만, 그것들이 떠난 뒤의 감각만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않으려 한다. 헛헛함을 인정하되, 그 안에 잠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거리를 장식하는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바라보며 성탄절의 본질은 화려함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완전한 자들을 위한 축제가 아니라, 힘겨운 삶에 지친 연약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온 한 소박한 이야기. 상실을 부정하지 않고 무너진 감각 위로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서사. 그런 의미에서 이 날은 다른 의미로 나를 붙잡는다. 확신에 찬 믿음이 아닌, 인간다움을 함께 나누는 따뜻한 공감과 나눔이 그리워진다.


2025년도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고 있다. 기쁨과 슬픔, 기억과 망각으로 뒤섞인 채로. 나는 예전처럼 이 날을 피하지도, 그렇다고 과하게 붙들지도 않고 있다. 잃어버린 것들 위에 이 하루를 조심스럽게 얹어두는 것. 어떤 기대나 헛된 희망 없이 담담히 이 삶을 받아들이는 것,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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