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 나오는 글이다. 플로베르는 이 문장 뒤에 이렇게 덧붙인다. 엠마는 마치 난파당한 선원처럼, 자신의 삶이라는 고독한 바다를 바라보며 안개 낀 지평선 너머 하얀 돛을 찾고 있었다고. 무엇이 올지, 어떤 바람이 그것을 데려올지, 자신을 어디로 실어 갈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오늘은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 기대했다고.
그러나 날은 저물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대는 반복되고 실망도 반복된다. 엠마가 지쳐 있었던 것은 단지 결혼 생활이 지루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녀를 더 지치게 한 것은, 매일 아침 새롭게 품는 희망이 매일 저녁 조용히 무너지는 그 반복적인 리듬이었는지도 모른다. 변화는 오지 않는데 기대만은 멈추지 않는 상태. 그 간극이 그녀를 점점 더 비현실적인 욕망으로 밀어 넣었을지도 모른다.
이 대목을 다시 읽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삶의 어느 시기에는 막연히 '어떤 사건'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가. 누군가가, 혹은 어떤 계기가 나를 다른 삶으로 옮겨주기를 바랐던 적은 없었는지. 현실을 조금씩 바꾸기보다, 현실을 통째로 뒤집어 줄 무언가를 기대했던 순간들 말이다.
엠마 역시 지루한 결혼 생활을 견디다 못해 낭만적인 변화를 갈망했다. 방향이 욕망적이었고, 그 결과가 비극적이었던 것이 문제였지만. 그러나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했던 마음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누구나 한 번쯤은 다른 삶을 상상하니까. 그녀는 현실을 조금씩 바꾸기보다, 현실을 단번에 뒤집어 줄 사건을 기대했다. 그 기대 속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은 점점 사라지고 없었다.
본격적으로 봄이 온다는 3월,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군가는 2월의 연장선에서 그저 익숙한 삶을 반복할 것이고, 누군가는 변화를 꿈꾸며 분주해질 것이다. 예전의 나는 계절이 바뀌면 삶도 저절로 달라질 것으로 기대하곤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달라지는 것은 계절이지 삶은 아니었다. 어쩌면 삶의 변화는 의지라기보다 태도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메아 쿨파(mea culpa)'라는 말이 있다. '내 잘못을 통해서'라는 뜻의 라틴어로, 고해성사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내 탓이다'라는 고백은 단순한 자책이라기보다, 내 삶의 일부를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 투성이다. 엠마처럼 원하지 않는 상황에 던져질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이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완전히 내 탓도, 완전히 세상 탓도 아닌 일들이 더 많다.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그 상황 속에서 내가 외면한 선택이 문제가 되었던 적이 많았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억울해한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를 외부에서 찾을수록 나 자신은 점점 치사해지고, 삶은 더 공허해진다. 그래서 3월이 된 지금 나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나에게 처한 상황 안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 상황이 바뀌지 않더라도 상황을 대하는 나를 바꿀 수는 없는지.
엠마의 비극이 온전히 그녀 탓만은 아니었듯, 우리의 삶도 단순히 한 사람의 책임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성숙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어쩌면 내 삶 속에 'mea culpa'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로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은 나를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나도 엠마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욕망이 내 안에 있다. 다만 이제는, 그 막연한 기대 대신, 주어진 지금을 붙들고 싶다. 지금 카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 그 선택이 지금의 나로서는 최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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