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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회복지사입니다만?

복지사 형준씨의 일일④ - 문학소년에게 닥친 절대절명의 위기(승)

7월이다.


본격적인 장마의 시작이야.


7월에도 여러 일정들이 연달아 있다. 그러면서 시간이나 잠을 쪼개 SNS나 브런치에 매일 글 쓰고 있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조금씩 패턴화되어가고 있어. 다시 재취업하면 한동안 못 쓸 수도 있기에 더 그런가?

하는데까지는 쭉 이어서 써 볼거야. 이번달도 잘 부탁해!




언제나 곁에 계실 줄만 알았던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된 걸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6학년 때였다. 지금도 기억나. 어머니께서 나와 형을 방으로 조용히 부르시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하셨어.


"오늘 병원에 갔다왔는데 6개월 판정을 받았다. 아빠 힘들게 하지말고 말 잘 들어 알겠지?"


어린 내게 이 사실이 무얼 뜻 하는지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울먹이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표정에 나도 덩달아 슬퍼졌을뿐, 믿기지 않았다. 언제나 내게 강하고 든든한 모습만을 보여주셨던 아버지가 병에 걸리시다니..그것도 간암, 말기라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조금씩 우리집의 분위기나 환경은 달라졌다. 넉넉진 않았지만 그래도 웃음과 나름의 여유가 넘쳤던 곳이 불안과 방치, 어수선함이 천천히 자리하기 시작하였다. 평소처럼 페인트 가게는 운영하였으나 통원치료를 선택한 아버지의 간호와 돌봄을 전담하게 된 어머니는 며칠씩 가게를 못 열때도 잦았다. 상태가 심각해져 병실에 입원하게 된 이후에는 할머니가 나와 형을 돌보셨다.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도 이때였을거다. 만만치않은 병원비, 어머니조차 우리 형제를 돌보지 못할 때가 잦다보니 저녁은 거진 배달음식이었다. 학교마치고 집에오면 신발장에 넣어진 15,000원. 형 만원, 나 오천원이다. 남겨진 쪽지에는 이걸로 저녁 시키거나 사다먹으라며 미안하다는 어머니의 짧은 메세지가 적혀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몇 주 안되서 끊겼다. 집에 있는 반찬으로 밥을 먹다가도 매번 김치 아니면 고추장이나 간장 등이었으니 부족한 영양분은 제대로 채우지 못하기 일쑤였다. 쌀이 떨어져 밥을 못 먹을 때는 안성탕면 하나 사서 물 많이 넣고 죽처럼 끊여 형이랑 나눠먹기도 했었다. 집에 있는 동전이란 동전은 다 긁어 모으거나 빈 병을 팔아 번 돈으로 말이다.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래도 불평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챙겨주지 못할 때가 그랬던 것이지 오랜만에 어머니가 집에 오시면 최소한의 영향은 챙길 수 있었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아버지가 입원하였을 때 어머니가 간병하러 자리를 비우러가 간 기간이 하루 내지 이틀이었던 것으로 본다. 지금이야 간병서비스 및 관련 지원 등 서울시를 비롯한 각 지자체별로 시행 중이지만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는 이런 제도가 없었다. 잘 모르기도 했고.


오매불망 나에게는 아버지의 회복이 우선이었다. 그러면서 학교생활하며 전처럼 일상을 보내려 무진장 애를 썼다. 우리 집 성향상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하는지라 친척들과 일부 이웃들 제외하고는 제대로 이 상황을 알리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아버지가 덜 고통받고 덜 힘들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계속 하나님께 기도했다. 아버지가 얼른 나아서 전처럼 여행도, 목욕탕도 같이가길 원한다고. 무너진 우리 집 다시 일으켜 세워달라고. 제발 죽지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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