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크리스마스다
날은 그렇게 춥진 않았는데
연말 분위기는 이번에도 크게 나진 않았어.
언제쯤이면 얼어붙은 서민들의 마음이 녹을까?
다음을 위하여 준비, 또 준비
그렇게 안내실 업무가 적응가던 어느 날이었다. 2010년 까까머리로 들어왔었던 나는 2012년 최고선임이 되어 소집해제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업무는 여자 선생님이 휴가를 가셔도 혼자 커버 가능할 정도로 능숙해졌다. 직원은 아니지만 직원처럼 행동하며 생각하니 기관의 전체 운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안내실이 그런 자리인 줄 스스로도 몰랐다. 10명이 넘는 후임들과 직접적인 교류는 많지 않았다. 각자 부서도 달랐고 크게 사고만 안치면 절대 터치하지 않았다. 종종 얼굴 보는 소수하고는 친하게 지냈지.
미래를 위한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말에는 복무하고 있는 기관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었다. 장애, 비장애인들과 함께하는 글쓰기 프로젝트로 기억해. 당시 고정욱 동화작가의 자문을 바탕으로 장애인식 개선 관련 캠페인인가? 교류활동을 몇 차례 했던 듯 하다. 소집해제하고 나서도 바자회 등 몇 차례 자원봉사 추가로 했지. 그뿐 아니라 여자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바쁘지 않는 선에서는 개인 공부나 글쓰기 등에 집중했었다. 그래봤자 30분 내지 1시간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외 토익에 공모전에 대외활동 등.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한 직원이 이런 말을 했었어. "사회복지사가 영어 공부를 왜 해?" 충격적이었다. 지금 이런 말을 하면 욕먹기 딱 쉽상이겠지. 이때도 다문화를 비롯한 이주여성 등 그들에 대한 복지가 서서히 꽃피우던 시기였다. 영어를 비롯한 제2외국어 습득은 선택이 아닌 이젠 필수가 되어가고 있는 거다.
소집해제 후 복학을 할 지, 한 학기 더 휴학하고 다음해 돌아올 지 고민되었다. 시기상 둘 다 양날의 검이지만, 그래도 스스로는 후자를 더 희망했었지. 그럼에도 남들보다 늦게 취업현장에 투입될까봐 조바심 났던 것도 사실이야.
그런 걱정어린 나의 표정을 여자 선생님이 보시고는 무슨 일인지 물으셨다. 걱정스러운 어투, 나도 모르게 안심시키고자 처음은 둘러댔지. 그럼에도 재차묻는 선생님께 더는 숨길 수 없어 고민하던 바를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자기 일처럼 걱정하시며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며칠 후, 나에게 소집해제 선물이라며 책 한 권을 주셨다. 그 첫 페이지에 쓰인 글귀가 지금 보이는 사진이다. 십 몇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꺼내어 본다. 그만큼 나에게 큰 힘과 위로를 주셨지.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 이는 후에 실천현장으로 돌아가 실무자로 근무할 때 나침반으로서 작용하였다.
그렇게 따스한 5월의 어느 봄날, 2년 간의 사회복무요원 근무를 마치고 정식으로 소집해제를 했다. 쑥스럽지만 표창장도 받고 많은 직원 및 후임들의 축하 속에 복지관을 나서던 발걸음이 어찌나 가볍던지. 햇살을 맡으며 천천히 아차산 중턱을 내려가던 그때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결국 복학을 한 학기 더 연장한 상황에서 내가 앞으로 해야할 일은 무엇인지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되던 때였다. 엄청난 경험 및 성과들을 쌓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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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사회복지사로의 길,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