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A.J.크로닌, <천국의 열쇠>
“너, 이 책들은 읽어본 적 없지?”
소년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자, 한 가지 팁을 주마. 어떤 문학 작품을 읽든지 작가가 내세운 작중 인물의 행적과 심리만 잘 쫓아간다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때 실패할 일은 거의 없다. 그 인물이 어떤 인물과 갈등을 벌이는지, 또는 내면에서 어떤 목소리들로 인해 괴로워하는지를 잘 봐라. 화려한 묘사와 독특한 배경, 기상천외한 구성은 그다음이야. 포장지보다 포장된 선물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어?”
그는 흰색과 갈색이 절묘하게 배합된 책을 들어 올렸다.
“먼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자. 톨스토이가 작중 인물로 맨 처음 등장시키는 게 세묜이지. 이 사람은 뭐랄까……, 특출한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야. 구두방을 운영하는데 톨스토이의 작품의 특성상 장사가 잘 되지는 않지. 매일 먹고사는 게 문제일 정도로 점점 가난해졌고, 손님들은 외상값도 잘 안 주니 여유가 있을 턱이 있나. 아내인 마트료나의 털옷을 사러 갔을 때에는 오히려 외상도 잘 통하지 않아 화만 잔뜩 나버렸지.(남은 쉽게 하는데, 나는 잘 안 되니 뭐 이런 세상이 다 있어하며 화나지 않겠어?) 홧김에 보드카를 사 먹고 빈손으로 터덜터덜 집에 돌아가다가 교회 옆에서 벌거숭이 남자를 발견했어. 소년,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아예 근처에도 안 갔을 것 같아요.”
“그래, 오늘날 자기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소시민들은 그런 일에 연루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아니, 피곤해한다고나 할까? 세묜도 처음에는 그렇게 행동했어. 전모를 알 수 없는 일에 그도 놀랐고, 두려워하다가 자리를 그저 피하려고만 했지. 남을 도와주기 어려운 자기 형편도 그렇고, 또 벌거숭이 남자와 같은 처지가 될까 봐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는데, 마음의 소리라고 해야 할까? 추운 겨울에 차디차고 어두운 곳에 외로이 남겨진 그 남자가 자꾸 불쌍하게 느껴지는 거야. 결국 다시 돌아가서 하나밖에 없는 외투를 남자에게 입히고 집으로 데려왔지. 대단하지 않아?”
“뭐가요?”
“사람들은 흔히 여유가 있을 때에나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이라고, 내 생활을 유지하고도 남는 돈이 있다면 그제야 남을 도울 만하다고 말하지. 연예인이나 기업인이 기부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나도 저렇게 많이 벌면 저만큼 기부할 수 있어’라고 자신 있게 장담하기도 하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돈이 넉넉하게 주어진다면 과연 남을 잘 도울 수 있을까?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의 질문에 소년은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에게 당장 몇십억이 생긴다면,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생긴다면, 그러면 충분히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케바케(case by case) 아니에요? 저는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뭐, 어떤 사람은 돕겠지만, 또 어떤 사람은 돕지 않겠죠…….”
뒷머리를 긁적이며 소년은 자신감 없이 대답했다. 그는 약간 한심한 듯이 소년을 봤다.
“요새 애들이 쓰는 말 중에 가장 성의 없는 게 ‘케바케’인 거 알아? 그렇게 따지면 세상일에 케바케가 아닌 게 어디 있냐. 우유부단해 보이는 양비론이나 양시론 같은 말 좀 쓰지 마.”
질책 서린 말에 소년은 바로 움츠려 든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이 아저씨는 자기 말을 이어가겠지만, 그런 소리마저 들었는데 별 대답 없이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가 꺼낸 우유부단이라는 단어 또한 소년의 처지를 꼬집는 것 같았다. 다시 고민했다. 세상에는 돈 많은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할아버지가 사는 지방의 농촌도 겉으로 보기에는 사는 모양새가 그럭저럭 대단치 않아 보였지만 다들 과수원이나 농장을 하나씩 낀 채로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다고 아빠가 얘기했던 게 떠올랐다. 그런 돈 좀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있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사회에서 자신이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싶다.
“아저씨, 아무래도 잘 돕지 못할 것 같아요. 지금도 돈 많은 사람 중에는 기부하는 사람보다 기부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데요……. 그냥 제 생각이에요.”
소년이 아까보다는 분명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표하자 그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흠, 물론 객관적인 통계가 없어 증명 안 된 논리이지만……, 그럼에도 자기 목소리를 낸 것은 칭찬해 주마.”
애초에 그는 소년의 의견이 논리적인지, 구체적인지, 객관적인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소년의 태도가 더 큰 문제였다. 제대로 된 손님의 진가를 드러내어 최상의 거래를 진행하려면 지식보다는 감정이 더 중요하기에, 그는 계속 소년의 말본새를 주의 깊게 살폈다. 다행히 소년은 그가 의도하는 대로 감정이 움직이고 있었다. 격렬하면서도 깊숙하게 숨어있는 감정을 끄집어내야 한다. 소년 스스로 견정한 태도로 그 감정을 개화하게 해야만 한다. 이런 그에게 소년의 목소리가 점차 견실해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입만 산 사람들이지. 그 사람들이 말하는 여유에는 한도가 정해져 있지 않거든. 나에게 쓸 돈은 딱 이 만큼이라는 기준을 정확하게 정해놓은 사람은 극히 드물고. 기준이 막연하면 돈이 생길수록 더 가지고 싶지, 남을 위해 내놓고 싶을까? 더, 더, 더, 아직은 부족해, 좀만 더 모으면 여유가 생길 것 같아, 남을 도와주기에는 내 형편이 어려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욕심을 합리화해 버려. 명확한 기준이 없으니 담쟁이넝쿨이 계속 위로 기어오르는 것처럼 욕심도 끝을 모르고 자라지. 돈이 문제가 아니야, 결국 마음의 문제지. 지금 사회를 봐도 돈 많은 사람만 남을 돕기 위해 기부하거나 봉사 활동하는 게 아니잖아? 오히려 자신이 먹고살기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대학에 장학금을 기부하고 소외계층을 위한 봉사활동에 더욱 힘쓰는 것을 보면, 돕고 베풀며 그렇게 사랑하는 일의 가능성을 돈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는 것은 정말로 어처구니없지.”
그의 입가에는 누군가를 향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소년은 이 아저씨가 욕심 많은 사람을 미워하게 된 이유가 따로 있을까 궁금해졌다. 아까도 비슷한 얘기를 하면서 냉소를 날렸는데, 혹시 공산주의자 같은 건가? 설마……, 간첩?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년은 오싹해졌다. 자신이 현재 간첩 질의 목표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지금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갑자기 저 닫힌 문이 쾅! 하고 열리며 국정원 요원들이 떼로 들어와 자신과 이 아저씨를 강제로 탁자에 거꾸러뜨려 양손에 수갑을 채울 것만 같았다.
“엉뚱한 생각 하지 마라. 무엇을 생각하든 간에, 그런 거 아니야.”
울상을 지은 소년이 엉덩이를 살짝 든 채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다시 앉아. 이십 분만 지나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는 소년의 동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말이 소년의 머릿속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소년은 슬며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 세묜이 벌거숭이 남자를 도운 일은 작지만 대단한 일이지. 어쩌면 세묜은 평범한 시민 계층도 아닌, 가난한 하층민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어. 자기 한 몸 건사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지. 남자를 그냥 버려두고 가도 뭐라 할 사람이 없는데 결국은 그를 도왔지. 집에 막상 도착하니 마트료나는 쌍심지를 세운 채 세묜을 비난하고 그 남자를 내쫓았어. 마트료나 입장도 이해는 가…….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아무 연락 없이 입 하나를 데리고 왔으니 분통 터질 만 해. 그런데 이런 마트료나를 진정시킨 세묜의 질문이 뭐였는지 알아?”
소년은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당신의 마음속엔 하나님도 없소? 이 질문 하나에 마트료나의 분노는 점차 누그러졌고, 벌거숭이 남자가 왠지 가여워졌지. 다시 집으로 들이고 식사도 제공하고, 결국 벌거숭이 남자인 미하일과 세묜 가족은 함께 살게 되었어.”
소년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야기한 앞부분 내용을 잘 기억해 놓고 있어. 자, 이제 그 후의 이야기야. 미하일은 구두 수선을 보조하면서 세묜과 같이 일하게 되었고, 일은 굉장히 능숙하게 잘해서 입소문이 크게 났지. 장사가 점차 잘 되면서 손님들도 많이 찾아왔는데, 어느 날은 덩치 큰 부자가 찾아와 귀한 가죽을 맡기며 일 년이 지나도 터지지 않는 장화를 만들어달라고 했어. 세묜은 그런 장화를 만들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미하일에게 가죽을 넘겨 장화를 만들게 했는데, 잠시 후 확인해 보니 미하일은 슬리퍼를 만들고 있던 거야. 너무 놀라 말리려고 하는 찰나, 아까 부자의 시종이 가게에 다시 와서 주문했던 부자가 방금 죽었다고, 그래서 장화 대신 장례식에 쓸 슬리퍼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어. 참 놀라운 일이지.
그리고 육 년의 시간이 흘렀어. 세묜의 가게에 두 여자아이를 데리고 한 여인이 방문했는데 미하일이 평소와 달리 두 아이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니겠어? 마트료나는 여인에게 사정을 물어보았는데, 이 사연도 기가 막히지. 원래 이 여인은 아들 하나만 낳아 기르고 있었는데 같은 마을에 살던 두 여자아이의 부모가 불행하게 세상을 뜬 후에 이들을 임시로 맡게 되었거든. 그러다가 자기가 직접 낳은 아들은 이 년 만에 죽었고 결국 임시로 맡았던 두 여자아이를 입양해서 여태까지 키워온 것이지.
그 여인이 이야기를 마치고 가게에서 떠나자 순간 미하일의 몸에서 빛이 나고, 그는 자신의 사연을 세묜 가족에게 털어놓아. 세 가지 질문과 세 가지 답에 대해 자신이 깨달은 것을 이야기한 후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작품은 마무리가 돼.”
소년은 이제 다 이해가 됐다는 표정이었다.
“아저씨, 순식간에 요약했네요? 그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끝난 건가요?”
“아니, 하나 이야기할 게 남았어. 이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시작과 끝이야. 마지막에 미하일이 올라가면서 깨달은 답, 작품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을 정리하자면, 첫째,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다, 둘째, 사람에겐 자신이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셋째,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이렇게 세 가지다. 사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고, 그 누구도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잖아? 알 수 없는 것은 두렵지. 어떤 해를 입을지 불안하고 걱정하게 만들어. 소년, 그런데 말이야, 너도 살아봐서 알겠지만, 불안해하고 많이 걱정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던?”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