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탐

by 김재선



식탐


난 팔 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여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업의 실패로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된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포함해서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 팔 남매 모두 열한 명이었다.

아버지는 빚에 쫓겨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셨고

나머지 모든 식구들의 생계를 떠맡게 된 어머니는 마냥 우시기만 했다.

전쟁도 아닌데 우린 보따리를 한 나씩이고 지고 변두리에 사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고모네 집에도 사촌형제들이 아들 다섯에 딸 하나여덟 명의 식구들이 있는 대가족이었다.

방이라고 고작 쪼끄만 방 3개가 전부인데 거기서 열아홉 명 살게 된 거다. 다행히 여름이라 마당에 평상을 펴놓고 자기도 하고 형들은 친구들 집에 가서 자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먹는 게 문제였다

고모부는 그때가 미 환갑을 넘기신 나이로 공무원일은 그만두시고 산에서 약초를 캐다 파셔서 근근이 생활하고 계셨는데 갑자기 불어난 식구들 먹이기엔 턱도 없이 부족했다.

불편한 관계는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불만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형제들끼리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고모네 큰형과 셋째 형은 한참 전쟁 중이던 월남에 파병 나가는 군대에 지원했고 대학생이던 큰형도 서둘러서 군입대에 지원했다 대학 일 년생이던 큰누나는 먹고 자는 가정교사로 집을 떠났다.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우리 식구들도 고모네 집에 할머니를 남겨두고 고모네 집을 나오게 되었다.

근처에 방을 하나 얻긴 했는데 아이들이 많으면 방을 안 줄까 봐

처음엔 둘 만 데리고 갔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두 명이던 아이들이 여섯으로 늘어나고 아침마다 그 당시는 집 밖에 있던 화장실을 우리가 서로 쓰느라 복작대서 쫓겨나기가 일쑤였다.

그러니 먹고사는 건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밥상 차려놓고 조금만 늦게 가면 반찬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맨 보리쌀 밥을 먹어야 했는데 기침 한번 하면 밥알이 모두 흩어져 주워 먹어야 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쌀밥커녕 보리밥도 구경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하루 세끼가 아니라 두 끼로 수제비와 칼국수를 먹는 날이 다반사가 되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철없는 막내딸이 칼국수 정말 좋은데 좋았겠네 한다.

칼국수라고 지금처럼 고명이 많이 들어가고 해물이 들어있는 게 아니라 손가락만 멸치 몇 마리 넣고 소금으로 간한 게 전부이니 맛이 있을 리 없다.

그나마 때를 놓쳐 늦게 먹는 날이라면 퉁퉁 불은 국수가 식어서 한 덩이로 뭉쳐있는 것에 더운물을 부어서 먹어야 했으니 그게 맛이 있을 순 없다. 그때 수제비에 국물에 불은 멸치를 먹고 체해서 심하게 토한 이후론 지금도 국 속에 들은 멸치는 못 먹는다.

그때부터 먹는 것에 대해 민감해지고 약아져야 했다.

생존경쟁에 돌입한 거다 막내라고 어느 누구도 봐주는 이 가 없었으니깐 아마도 그때부터 빨리 먹고 많이 먹는 식탐이 내게 생긴 것 같다 있을 때 먹어야 굶어도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식구 중 누가 생일이라도 돼야 그나마 봉지쌀 사다가 보리쌀 섞은 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날이다

견디다 못한 작은누나는 서울대에 입학했으면서도 등록금 걱정으로 간호장교 사관학교로 들어갔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시켜 주고 장학금까지 준다니 우리 형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또 한 식구가 떠나갔다

나도 어느새 국민학교에 들어가고 삼 학년이 되었다.

도시락을 싸가야 하는데 그게 또 문제가 되었다 이미 형들 세 개의 도시락에 한 개가 더 추가해서 네 개를 싸야 하는데 밥도 밥이지만 반찬이 더 문제였다.

매일 거짓말처럼 똑같이 이웃집에서 지난겨울에 담근 김장김치 남은 것을 얻어다 물에 씻어 볶은 김치 하나다.

요즘같이 흔한 계란 소시지는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정말 잘 사는 집 아이 한두 명 싸 오곤 했다.

가끔 너무 먹고 싶으면 우리 집 쪽방 향에 사는 철민이 집에 갈 때 가방 들어주는 조건으로 한 조각 얻어먹곤 했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 그 맛이 아까워서 점심시간이 다 끝나도록 삼키지 못했다 되씹고 되씹어 무슨 맛인지 모를 때까지 씹었다.

학년이 바뀌고 국민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친구들 도시락쯤 아무렇지도 않게 훔쳐먹을 정도 난폭해져 있었고 친구들 탐나는 물건은 뺏거나 훔치기 일쑤였다.

결국 어머니가 학교로 불려 오시고 난 전학을 가야 했다.

전학 가던 날 어머니는 내손을 꼭 붙잡고 우시면서 말씀하셨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 네 아버지는 도둑 잡는 경찰이셨다."

그 아들인 너는 도둑 될래! 어머니의 말 한마디가 가슴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그런데도 입은 생각과 달리 "왜 책임도 못질 자식은 낳은 거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고 말았다.

갑자기 눈에 별이 확 보였다 뺨이 얼마나 얼얼한지

제자리에 우뚝 멈쳐섰다.

뺨을 때린 어머니는 주저 않으셔서 우셨다.

우는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나도 울었다.

"엄마 미안해"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봤다.

엄마는 부끄러워 셨든지 내 팔을 끌고 골목으로 갔다.

한참 울음을 끝 치고 치마로 내 얼굴을 닦아 주셨다.

"학교에 가자"

새로운 학교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배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으셨는지

근처 중국집으로 내손을 붙잡고 들어가셨다.

"여기 자장면 하나요!"

어머니는 자장면을 한 그릇만 시키셨다.

자장면이 나오자 어머니는 나무젓가락을 쪼개서 비비기 시작하셨다. 한 젓갈 떠서 맛보시고

"맛나다 식기 전에 어서 먹어라" 하고 내 앞으로 미셨다ᆢ

나는 정말 정신없이 먹어댔다.

얼굴에 짜장이 번복이 돼도 알랑 곳 하지 않았다,

그릇 밑바닥이 보일 때쯤 엄마를 쳐다봤다 "어서 먹어라

엄마는 용식이네 김장도와 주고 맛있는 거 먹을 거니깐"

나는 남은 양념까지 먹어치우고 젓가락에 묻은 양념까지 빨아먹었다.

어머니는 흐뭇한 얼굴을 하시고 내 얼굴을 화장할 때 쓰시던 아끼던 가제손수건을 꺼내 닦아주셨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학교에 들어가는데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렸다 그해의 첫눈은 그렇게 내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작은형을 따라 신문 돌리는 일을 했다.

지금 홍은동은 그 당시 못 사는 동네라 언덕 골목길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라 신문 돌리는 게 쉽지는 않았다.

형이 높은 데는 나보고 올라갔다 오라고 한다.

한참 올라가서 신문을 던져 넣고 돌아서는데 배달된 하얀 우유가 가득 찬 병이 놓여 있었다 들어서 형에게 보여 주었더니 갖고 내려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살짝 들어서 들고 내려오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개가 뛰어나와 종아리를 물었다

너무 아프고 놀라고 무서워서 계단을 굴러 내려왔다손에 들었던 우유병은 깨지고 팔에 끼고 있었던 신문은 비라처럼 하늘을 날았다.

얼굴도 긁히고 머리도 깨져서 피가 났다.

아픈 것 보다도 우유 도둑질하려던 것이 더큰일이다.

주인들은 놀래서 뛰어나오고 동네가 시끄러워졌다.

형은 태연히 말했다.

"아니 어떻게 개를 묶어 놓으셨기에 개가 나와서 내 동생을 무냐고요?"

집주인은 깨진 우유병과 널브러져 있는 신문을 보면서 혼란스러워했다

형이 드디어 울기 시작했다 "내 동생 어떡해요 물어내요 "

난 형이 거짓으로 운다는 걸 알았지만 집주인들은 당황했다 작은 대문 사이로 내 또래 소녀가 아까 징기라는 빨간약과 약솜을 들고 나왔다

집주인이 깨진 머리와 물린 종아리에 약을 바르고

만 원짜리 녹색 지폐를 손에 쥐어주었다.

형과 난 얼른 인사를 하고 거길 빠져나갔다.

우린 받은 만원으로 만화도 빌려다보고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사 먹었다. 만화가게에서 파는 떡볶이와 어묵은 언제 먹어도 맛있.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다 들으신 후에 깨진 머리보다 개에 물린 종아리가 문제라면서 그 집을 찾아가자면 괜찮다는 나를 끌고 나섰다. 문을 두드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짖어대는 개를 보더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개를 덥석 잡더니 털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놀란 개는 어머니의 무서운 기세 눌려서인지 짓지도 못하고 꼬리를 감추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한 움큼의 털을 뽑아낸 어머니는 그걸 돌돌 말아서 갖고 가신 성냥으로 불을 붙여 내 물린 종아리에 사정없이 지져댔다.

너무 뜨겁고 아팠지만 어머니 기세 눌린 개처럼 울음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아프다는 비명도 못 지르고 "엄마 왜 그래요"만 연신 말했다. 털이 타들어가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이래야 광견병에 안 걸린다"는 말이었다

치마를 걷어 올리시고 속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싼 손수건을 푸시고 그 안에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서 도로 주인 손에 쥐어 주셨다.

"우리 아이가 댁에 집 우유가 먹고 싶어서 생긴 일입니다

치료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을 보내고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정말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아버지가 다시 우리 가족에게로 나타났다.

우린 이른 봄 방 두 개짜리 독채 전세 집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수제비 대신 물 마시고 출렁이던 배를 붙잡고 자는 일도 없어지고 도시락도 꼬박꼬박 싸가게 되었지만 먹는 식탐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았다.

여러 번의 암수술을 거친 후 먹고 싶은 게 없어진 게 신기할 정도다.

잘 먹어야 수술한 몸이 잘 회복한다고 아내는 보신탕이며 고단백 음식을 차려보지만 몇 숟갈 뜨다가 많이 답답한 노릇일 게다.

얼마 전부터 어렸을 적 어머니가 가끔 아주 가끔씩 해주시던 석쇠불고기가 먹고 싶어졌. 아내에게 말하니 마포에 잘하는 집이 있다고 가잔다

매캐한 담배연기와 시끄러운 소음 조미료로 버무린 수입산 쇠고기가 그 맛을 내지 못한다. 몇 점 집어 먹고선 서둘러 나왔다

모처럼 아내의 손을 잡고 걷는데 올해 첫눈이 내린다.

아내는 처녀 적 테이트 생각했는지 우리 첫눈 와서 덕수궁에서 데이트한 것 생각나냐고 묻지만 난 중국집 앞에서 가제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던 어머니가 저만치 있는 중국집 앞에 서 계실 뿐이다.

몸이 아파서일까? 첫눈이 내리는 오늘 돌아가신 어머니가 유난히 보고 싶다.

"어머니" 조용히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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