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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음뱅이 Jan 07. 2019

추억이 아름다울수록 슬퍼지는 불행

보이후드,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4

타임머신 무료 이용권을 얻는다면 당신은 언제로 떠나겠는가. 당장 미래가 불확실하다면 10년 뒤에 내가 사람 구실 하며 살아갈지 확인하고 싶을 수도 있겠다. 이 고통스러운 취준생 미션은 몇 년 만에 클리어하냐? 헐, 아직까지도 월세 내면서 보증금 500짜리 원룸에 살아? 결혼은 역시 못 했구나…. 

뭐야, 나이만 더 처먹었지 한심한 건 십 년 전이랑 똑같잖아?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면 20년 후로 날아가 확 바뀐 세상을 훑어보는 것도 재밌겠다. 대통령은 누가 됐지? 헐, 남극 빙하가 벌써 저만큼이나 녹았네. 이젠 일기예보 시간에 기온보다 미세먼지 수치부터 알려주는구나. 애플은 아이폰30s를 낼 때까지도 ‘혁신’이 없다고 까이는 거야? 

계산 빠른 사람은 고민할 것도 없이 다음 주 토요일 저녁으로 가서 손바닥에 적힌 숫자 여섯 개와 함께 유유히 현재로 돌아올 것이다. 모르지, 너 같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1등 상금이 용돈 수준일지도. 뭐가 됐든, 언제 타임머신이 개발될지 모르니 미리미리 플랜을 짜놓으시길. 

<보이후드>는 타임머신이다. 오프닝부터 흘러나오는 콜드플레이의 ‘Yellow’와 함께 3시간짜리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단, 도착지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다. 6살짜리 소년 메이슨이 대학에 들어가기까지의 12년을 보면서 잊고 있던 추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영화를 봤던 상영관에서도 각자의 보이후드, 걸후드가 공중을 둥둥 떠다녔을 것이다. 

이 타임머신의 비밀은 ‘시간 물량 공세’다. 시간의 흐름을 담아내기 위해 영화를 장장 12년에 걸쳐 찍었다. 배우 엘라 콜트레인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바뀐 외모·눈빛·목소리가 메이슨에 그대로 반영됐다. 함께 연기한 에단 호크, 패트리샤 아퀘트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 

시간여행은 성공적이었다. ‘맞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런데 동시에 슬퍼졌다. 뭘 어떻게 해도 그 시절의 나로 다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전몽각 교수의 사진집 『윤미네 집』이 생각났다. 딸 윤미가 태어난 뒤 시집가기까지의 일상을 아버지가 틈틈이 사진으로 남겼다. 페이지를 넘기기가 아까울 만큼 아름다운 사진들이 가득한데, 그래서 슬프다. 책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잊히는 것을 떠올리게 하고 다시 숨 쉬게 하는 사진. 한 장의 사진이 담고 있는 것은 과거의 한 순간이지만 그것이 되살리는 것은 그 순간을 감싸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감정이다. 되돌아가지 못해 더 아름답게 추억될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들이 사진 속에서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윤미네 집>, 전몽각, 2010

아름답지만, 되돌아갈 수 없는 순간. 영화가 끝나기 직전 메이슨의 마지막 대사처럼, 우리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잠시도 붙들어놓을 수 없다. 타임머신 탈 기회가 생기면, 난 과거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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