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벅, 필 모리슨, 2005
서울 생활을 시작한 후로 포항 집에 내려가면 자주 탈이 났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데도 체했다. 학교도 회사도 안 가고 온종일 집에만 있으니 피곤할 일도 없는데 몸살이 났다. 독감이 유행하는 시기도 아닌데 감기에 걸려 콧물을 달고 살았다. 아무래도 객지에 혼자 살면서 바짝 긴장해 있다가 집에 가면 갑자기 맥이 풀려서 몸이 아픈 것 같았다.
한편 가족들은 서운함을 내비쳤다. “집에 있는 게 얼마나 불편하고 싫으면 올 때마다 컨디션이 안 좋노?” 둘 다 말은 된다.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편안하지만, 안 하던 긴장을 할 만큼 신경 쓰이는 것도 사실이니까.
집마다 정도의 차이는 조금씩 있겠지만, 원래 가장 편하면서도 가장 불편한 존재가 가족이다. 영화 <준벅>에 등장하는 조지네처럼. 시카고에서 자리를 잡은 조지(알렉산드로 니볼라)는 아내 매들린(엠베스 데이비츠)과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한다.
고향 집에는 동생 조니(벤저민 매켄지)와 그의 아내 애슐리(에이미 아담스)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아들의 취향, 입맛부터 사소한 습관까지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 페그(셀리아 웨스턴)는 조지가 좋아하는 치즈를 발효시켜 놓고 기다린다. 출산을 앞둔 애슐리는 무거운 배를 버거워하면서도 매들린을 졸졸졸 따라다니며 살갑게 대한다.
매들린의 손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주다가 대뜸 이렇게 말하는 애슐리는 천진난만하고 따뜻하다.
“심심하거나 대화 상대가 필요하면 벽을 쾅쾅 두드려요. 그럼 바로 나올게요.”
애슐리의 말처럼 이 집에서는 벽을 두드리는 것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방음이 잘 되지 않아 어느 방에서 누가 뭘 하고 있는지 훤히 다 들린다. 심지어 조지와 매들린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도 온 가족에게 공유될 정도다.
가족도 방음 안 되는 집이랑 비슷하다. 속마음을 훤히 잘 알아서 어쩔 땐 편하지만, 감추고 싶은 속사정까지 내보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끈끈히 연결되어 있다고, 아니 그래야 한다고 믿는 가족 안에서 누군가가 답답함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간사하다. 추울 땐 이불로 온몸을 꽁꽁 싸맸다가도 체온이 높아지면 금세 걷어차버린다. 이불 대하듯 사람을 대했다가는 뺨 맞기 십상. 당장 “넌 필요할 때만 연락하냐?”고 따져 묻는 친구들이 생긴다. 그런데 가족에게는 유독 염치없이 간사하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면서도, 정작 같이 있을 땐 ‘불편하다’며 이불 차버리듯 등을 돌린다. 그러고 혼자 밥을 먹으며 또 따뜻함을 그리워한다.
그렇기에 시카고로 떠나는 차 안에서 조지가 매들린에게 하는 말을 이해하면서도 왠지 쓸쓸해진다. “여길 떠나는 게 진짜 신나.” 지금은 물론 진심이겠지만, 곧 다시 ‘여길’ 그리워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