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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음뱅이 Dec 05. 2018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지지 받지 못하는 불행

폭스캐처, 베넷 밀러, 2015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 읽진 못했지만 첫 문장은 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 문장처럼 불행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을 만나서, 제도가 불합리해서 등등. 그럼에도 우리는 복잡다단한 불행을 한마디 말로 쉽게 규정하곤 한다. “자존감이 낮아서 그래.”


문제의 원인을 ‘낮은 자존감’에서 찾으려는 태도는 결코 불행한 사람을 돕지 못한다. 자존감이라는 게 근육량 늘리듯 노력만으로 높일 수 있는 건가? 누군 태어날 때부터 높았나? 제아무리 강한 사람도 한 번은 무너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지지대가 되어주는 건 자존감이 아니라, 성급한 말을 아끼며 불행의 이유가 뭔지 들어주고 같이 마음 아파해주는 사람들이다.

데이브(마크 러팔로)와 마크(채닝 테이텀)는 부모 없이 서로를 의지하며 자란 형제이자 레슬링 선수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영화에는 형 데이브가 동생 마크의 근육을 풀어주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데이브는 동생의 근육 어디가 잘 뭉치는지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다. 마크가 무너졌을 때, 당연히 그의 곁엔 형이 있다.


중요한 경기를 몇 시간 앞두고, 심리적 압박을 이기지 못한 마크는 ‘폭식’을 한다. 레슬링은 체급별로 치러지기 때문에 체중이 허용 범위를 넘어버리면 출전 자체가 불가능하다. 정신없이 케이크를 먹고 있는 마크를 발견한 데이브는 사정없이 뺨을 때린다. 그러고는 안아주며 말한다. “마크. 넌 혼자가 아니야. 난 네 형이고 널 사랑해. 이렇게 무너지게 두지 않겠어.” 손가락을 집어넣어 먹은 것들을 토하게 하고, 두꺼운 옷을 입혀 사이클에 앉힌다. 결국 형의 도움으로 마크는 몇 분 남겨놓고 ‘속성 체중 감량’에 성공한다.

듀폰은 레슬링 팀 ‘폭스캐처’를 운영하는 재벌가의 상속인이다. 그에겐 데이브 같은 형이 없다. 하나 남은 피붙이인 어머니는 레슬링을 ‘천박한 스포츠’라 부르며, 듀폰이 이뤄낸 것들 중 무엇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듀폰은 물려받은 돈으로 ‘지지대’가 될 만한 것들을 끊임없이 사 모은다. 자기 팀으로 스카우트해온 마크&데이브 형제도 그중 하나다. 경제적 지원의 대가로 듀폰이 원하는 건 ‘금메달’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존경심이다. 뛰어난 레슬링 선수인 데이브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멘토 같은 분”이라 부르길 바라고, 우스꽝스럽게도 공식 석상에서 스스로를 “존경 받는 조류학자이자 저자이자 탐험가이자 5종 경기 선수”로 소개한다.

그러나 돈으로는 끝내 존경을 살 수 없었고, 지지대를 찾지 못한 듀폰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듀폰은 자존감이 낮아서 불행해졌을까. 아니, ‘낮은 자존감’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누구도 듀폰의 지지대가 되어주지 않아서 자존감이 낮아진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불행 앞에서, ‘자존감을 높이라’는 조언을 하기 전에 그의 지지대가 되어주자. 만약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신이라면, 낮은 자존감을 자책하지 말고 손을 내밀자. 내가 무너지지 않게 지지대가 되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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